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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복층 계단을 올라가면 책, 책

꿈의 집이라면 여기가 그곳

by 정아름

사람들은 가끔 아니면 자주 착각에 빠진다. 지금 정도면 괜찮다는, 더 나아져봤자 하는, 어쩌면 자포자기의 심정. 없는 사람들의 공통된 자기 위로일까. 그래서 나는 나를 이제 위로하지 않고, 착각 속에서 나오기로 했다.


그 답이 나에게는 '이사'였다.


버거운 정신적인 싸움에 밤마다 벌떡벌떡 일어나 찬물을 마시고 숨을 한번 다시 쉬고 누웠는데, 상황과 사람을 저주할수록 마음은 망가져 가는 게 느껴졌다. 망각의 은혜는 왜 내게 임하지 않는지, 나는 잊지 위해 다그쳤지만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감히 '이사'는 필요했다.


소득이 적어 처음으로 혜택을 봤다. 1.7%의 버팀목 대출이 가능했던 것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타이밍이란 참 기가 막히고 그 기회를 잡지 못하면 이사의 꿈은 날아갔을 것. 길고도 복잡한 대출 과정을 거쳤고 우리는 결국에 '복층 빌라'로 이사 올 수 있었다.


우리 집의 베란다도 너무 사랑스럽지만, 맨 처음 이 집에 반했던 건 복층구조의 집에 위층에 가득 놓인 책장들이었다. 전 집주인 아저씨는 만화책 마니아로 책장을 여덟 개를 계단을 올라간 위층에 붙박이로 짜 놓으셨다. 집을 구경하러 계단을 올랐는데 펼쳐진 가득 꽂힌 책과 책들의 세상이라니.


아, 이거야! 내가 하고 싶었던 것.


솔직히 말하면 책을 장식해두는 것을 좋아하는 것인데, '남편은 산 책은 좀 읽지'하는 표정이고 나는 기어코 책장에 예쁘게 가지런히 꽂을 책들을 사고 만다. 그래도 요즘은 김애란 작가님 소설이 너무 좋아서 두 권을 정독하며 읽는데 아직도 읽어야 할 책들이 쌓이고 쌓였다. 다른 사람들이 가방이나 신발을 사서 진열하고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나는 책에 그렇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그 욕망이 줄어든 편인데 아무래도 이 책장 있는 집에 오고 다시 부활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책들을 구경하러 계단을 올라간다. 여름은 더워 위층에 잘 올라가지 않게 되는데 자료를 찾거나 아니면 그저 책들이 잘 있는지 보고 싶어서 한 번 다녀온다. 계단을 올라가면 책, 그리고 책들. 책 위쪽 손이 닿지 않은 공간에는 앤틱들을 놓았다. 커피밀과 찻잔과 라디오와 태엽 감는 시계까지. 그 전의 집은 앤틱을 놓을 분위기도 아니었고 자리도 없어 꽁꽁 비닐로 싸매 침대 아래 넣어 두었다. 나중에는 있는지도 몰라서 이사하면서 '이런 것도 있었지' 했는데 그 소중한 것들에게 얼마나 미안하지.


내가 스무 살부터 점심값을 아껴 샀던 나의 소설들을 처음으로 한 곳에 꽂게 되는 감동. 베란다만큼이나 소중한 공간이 또 생겨나고 나는 온종일 집 속에서 쓸고 닦으며 분주하게 움직인다. (복층 청소는 정말 쉽지 않다ㅠ)


남편의 책이 반, 내 책이 반 그리고 자잘한 아이들 책들까지 집을 가득 채웠다. 이삿날, 복층인 데다가 책이 너무 많아서 저녁 6시가 다 되도록 이사가 끝나질 않았고, 일하시는 분들께 너무 죄송해 손이 베이도록 나는 책을 꽂았다.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는 통영에서 한동안 굴을 까는 일을 했다. 엄마를 만나려고 늘 바닷가 앞 비닐하우스에 갔다. 일렬로 앉아 굴을 까고 있는 아주머니들의 손은 얼마나 빠른지 인조인간 같았다. 아빠는 조선소에서 일을 했다. 밤샘 작업으로 집에 오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토요일이면 시내로 넘어가기 전 토성고개에 있는 중고서점에 가서 사고 싶은 만큼 책을 사 주셨다. 나는 흡혈귀 가족이 나오는 동화책을 그렇게 재밌게 읽었는데 그래서 지금 소설만 쓰려고 하면 자꾸 판타지로 가나보다. 그리고 그 대가일까. 지금의 엄마에게는 망가진 손과 무릎이, 아빠에게는 사라지지 않는 암덩어리가, 나에게는 책과 글이 남았다.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는데 굴을 까던 앳된 엄마와 시꺼먼 작업복을 입은 아빠의 1988년 어떤 날이 흐릿하게 떠오르고 그 돈으로 나는 복층 빌라에 살고 있고,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아이인 것 같은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 자신을 보니 전날 매운 것을 잔뜩 먹은 것처럼 속이 몹시 아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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