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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30년 된 아파트 VS 5년 된 복층 빌라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by 정아름

30년이 넘은 엘리베이터 없는 아파트에서 7년을 살았다. 특히 5층 꼭대기층에 살았던 2년 동안은 살이 찔 틈이 없었다. 올라가다 두세 번은 쉬어야 했다. 3층을 넘어서면 나도 모르게 EC 소리가 나왔다. 몸에 밴 언어처럼 자연스러웠다. 택배 아저씨에게 너무 미안해 5층 택배는 경비실에 두고 가시라 했다.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안고 오르락내리락하던 2년째 어느 날 나는 저녁 식사 보이콧 한 달을 하고서야 남편에게 이사 승낙을 받아냈다.(어쩔 땐 아주 드물게 너무 힘든 남자가 확실ㅠㅠ)


"나 밥 안 해!"

너무하기도 하지만, 아주 가끔은 꼭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이사 온 아파트 역시 30년이 넘었는데 1층이어서 계단의 수고는 확실히 덜었다. 또 작고 오래된 아파트라도 단지 내에 작은 놀이터가 있고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었다. 아이들은 옆집, 뒷집 아이들과 몇 시간을 나가 뛰놀다 집에 와서 물을 마시고는 다시 나갔다. 아이들이 잘 놀아주니 너무 편했고 눈에 보이는 곳에 아이들이 있어 안심이 됐다. 아파트 앞 전통시장에서 이것저것 장을 봐서 저녁을 준비하며 최상의 아파트라고 나름 생각했다.


옛 아파트라 확장형이 아니었고 앞뒤 베란다는 요긴하게 쓰였다. 앞 베란다에는 꽃을 키우고, 빨래를 널었고 뒷 베란다에는 세탁기와 김치냉장고를 놓고, 가장 중요한 어마어마한 캠핑용품들을 쌓아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전세 1억에 22평 아파트는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희귀한 매물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며 살고 있었다.


그러다 장마가 오면서 창문 틈으로 비가 들이쳐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실리콘으로 창틈을 메워도 소용없었다. 남편은 30년이 넘은 아파트가 이 정도면 튼실한 편이라 했다. 나는 그 말을 믿었다. 지금 와서 보면 믿을 도리밖에. 비가 그치자 방의 구석마다 곰팡이 꽃이 활짝 폈다. 아무리 닦아도 마치 살인의 현장처럼 흔적은 남았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독한 약을 쳐도 개미와 바퀴벌레는 끊이지 않았다. 아침마다 화장실 전쟁은 안 봐도 비디오.


그렇게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대망의 겨울이 찾아왔다. 영하 10도가 넘어가자 수도가 두 번 터졌다. 세탁기는 동상처럼 얼어버렸다. 집의 모든 것이 정지됐다. 더 문제는 보일러를 돌려도 이 오래된 집은 좀처럼 데워지질 않았다. 시린 손을 비벼가며 입김을 불면서 책장을 넘기고 글을 썼다. 양말을 두 개 신고 패딩을 입고 겨울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밤이면 여린 아이의 몸을 안고 언 몸을 녹였다.


집값이 오르고 30년이 넘은 22평 아파트 매매가 4억을 치솟았다. 아파트만이 대세였다. 사람값보다 더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다간 전셋값도 곧 오를 것 같았다. 7년째 되던 작년 여름, 나는 하루를 살아도 방문이 제대로 닫히고 잠기는 집, 햇빛이 드는 집, 화장실이 두 개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한 달 동안 매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무엇을 보이콧해야 할지 몰라 밤마다 남편을 앉혀놓고 눈을 똑바로 보고 진심을 전했다.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으리라 사명감을 다지면서 깨끗하고 괜찮은 집에 살고 싶다고 물러서지 않을 기세로 전진.


한 달 동안 매일, 쉬지 않은 나의 진심은 남편을 움직였다.(이 돌덩이 같은 남자ㅠㅠ)


남편은 할 수 없이, 진짜 할 수 없이 나를 맞춰주기 위해 집을 보러 다녔다. 때론 고맙게도 누군가가 더 사랑하는 편이 더 나을때도 있다. 그렇게 네 번째 집까지 돌았으나 별 희망이 없었다. 우리가 빌릴 수 있는 돈의 한계로는 지금처럼 30년 된 엘베 없는 아파트에 살거나 최근 지어진 빌라로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는데 사방이 다 막힌 빌라는 집이 아니라 감옥 같았다. 창문을 열면 콘크리트 벽이라니, 참담했다. 이사의 꿈은 허황된 것이었을까. 그날 밤 너무 서럽고 슬퍼서 집 문턱을 넘는 것조차 버거웠다. 처음 살았던 집보다는 더 나아졌다는 자기 위로를 퍼부었으나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리고 다섯 번째 보러 가게 된 집, 기존 30년 된 아파트보다 10배는 좋아보이는데, 매매가격은 더 싸다.


왜? 빌라라서.


그리고 너무 넓어보였다. 1평, 1평 차이가 이렇게 컸던가? 22평과 29평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게다가 야외 베란다가 있는 복층 빌라를 둘러 보며 남편은 첫눈에 반한 듯 전세가 아니라 집을 매매하자고 했다. 돈도 없는데 무슨 집을 사? 나는 집이 마음에 들긴 했지만 살 생각은 없었다. 갚아 나갈 능력이 우리에게 아직은 없다고 혼자 처량 맞게 속삭였다. 결국 방법은 친정과 은행에 돈을 왕창 빌려 살게 된 지금 집.


그리고 5년 된 복층 빌라는 문이 잘 닫힌다. 또 잘 잠긴다. 창문은 삐그덕 소리가 나지 않는 무려 이중창이다. 아이방, 우리 방, 서재, 손님방까지 방은 네 개인데 활용도가 높고, 방이 작은 대신 거실이 커서 훨씬 마음에 든다. 계단을 올라가면 붙박이 책장이 여덟 개. 남편과 나와 아이들의 책을 모두 꽂을 수 있다. 위층, 아래층 모두 큰 책상을 두어 어디서든 책을 볼 수 있다. 4,5, 층이 집인데 두 층다 야외 베란다가 있고 4층은 정원을 꾸미고 5층은 짐들을 두었다. 그리고 야외 베란다가 좋은 점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도심 속 오아시스' 같은 곳. 무엇도 가능한 우리의 야외 베란다.


자, '4억대 30년 된 엘베 없는 22평 아파트'와 '3억대 5년 된 베란다 있는 29평 복층 빌라' 사이. 우리는 우리가 같이 살아갈 오늘을 선택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변하지 않는 '오늘'을 견디는 건 너무 가혹한 짓이니까. 그러다 오늘도 내일도 잃어버리는 경우는 숱하게 많이 봐왔고, 다가오지도 않은 앞날을 위해 지금을 소모하는 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휙휙 사라져버리는 소중한 시간들을 부여잡느라 바쁜 여름 속, 오늘도 나는 쓴다.


p.s

이사 온 집을 가장 만족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바로 바로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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