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업고 짐을 들고 다니는 상황이 되면서 비만 보면 '에이, 이런' 소리. 그러다 아이가 등에 뉜 채 잠이 들고, 무거운 장바구니는 자꾸 흘러내리고 우산 들 힘조차 떨어지면 '아' 하고 멈춘다. 그냥 길에서 멘탈은 공기 중으로 훨훨 날아가는데 나간 정신을 도로 찾을 여력이 없다.
거기서 끝은 아니지. 옆에는 또 다른 아이가 '엄마, 비가 와요.'하며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으니 '비가 오는 날'을 좋아했던 나는 '비 오는 낭만'을 즐겼던 그녀는 어디로.(그럴 땐 다 같이 비를 맞고 가는 것도 방법인데, 굳이 힘겹게 비를 피하려고만 했을까. 좀 젖는 게 어때서)
하지만 '비를 보는 것'은 여전히 좋다. 가만히 창밖으로 내리는 비를 보면 커피도 더 맛있고 글 쓸 맛이 난다. 어울리는 음악을 듣고 싶고 괜히 오븐을 돌려 빵도 굽고 싶어진다. 비가 내리는 모양이나 타닥이며 바닥에 떨어지는 빗소리, 식물에 닿아 있는 빗방울들의 동그라미들, 흐리고 우울한 분위기까지도 이상하게도 내 취향.
더구나 이사 온 집에서는 베란다에서 비가 오는 것을 보는 것이 좋다. 옛집의 마당 같은 공간. 우리 집의 바깥은 이사 온 이유의 팔 할인데, 나중에는 진짜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이런. 이사 온 지 일 년도 안 되었는데 또 과한 욕심이구나.
비가 오니 꽃들이 식물들이 좋아하는 게 보인다. 진짜, 이런 게 보이다니! 예전에 엄마가 그런 말 할 때 하품을 하며 엄마의 '허상' 혹은 감정이입의 '과몰입' 정도로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가리어졌던 태초의 자연이 보이나 보다. 맨 처음 세상에는 꽃도 말하지 않았을까. 쓰고 나니 좀 무섭네.
"비 오니까, 밖으로 나와."
"오랜만에 비네."
"그러네."
따뜻한 차를 가지고 나와 녹색 차양 아래 나무의자에 앉아 내리는 비를 본다. 별말이 없이도 비 내리는 풍경이 베란다를 채워서 쓸쓸하지도 허하지도 않은 오후.
아, 음악 듣자. 한얼씨 꺼.
독일에서 알게 된 한얼씨가 트리오로 음반이 나왔다. 재즈 음악이라 선뜻 더 마음에 들었다. 독일 한인교회에서 한얼씨가 찬양팀에서 메인피아노를 반주하고, 동생이 잠깐 세컨피아노를 쳤는데 주일마다 집으로 돌아온 동생은 말했다.
"한얼이 형은 천재야!"
감탄 스며나오는 목소리로 어찌나 자랑을 하던지. 비전문가인 우리는 그저 끄덕끄덕였는데 한국에 한얼씨가 귀국하고 트리오로 음반을 냈다는 소식에 바로 cd를 구입했다. 그런데 정말, 너무 좋다. 이런 경음악을 즐겨 듣게 되다니. 작곡한 한얼씨는 천재 맞았고, 트리오의 연주는 대중적이면서도 신선하고 분위기가 있다. 드라마 ost처럼 잔잔하면서도 느낌이 있고, 무엇보다 오래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