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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름 Jun 16. 2023

해 질 녘 두 가족은 실루엣이 되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지문

“해 질 녘 두 가족은 실루엣이 되어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부모인지 알 수 없었다.”


-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마지막 장면 지문_고레에다 히로카즈


환상의 빛으로 만난 고레에다 감독. 이후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세번째 살인,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등을 만나면서 나는 고빠가 되었다. 그의 작품은 진실하며 따뜻하고 의미에 의미를 던지면서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마음을 울려 숨을 쉬기 곤란할 정도로 먹먹해진다. ‘저런 글을 쓰고 싶다. 저런 대사를 쓰고 싶다.’ 마음은 쿵쾅거린다.


(걸어도 걸어도와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다시 볼 예정. 시간이 지나면 왜 ‘좋았다’ 말고는 아무 기억도 없는지.)


한참을 빠져 있었던 일드, 그리고 지브리의 애니메이션들, 요시모토 바나나와 에쿠니 가오리, 오쿠다 히데오와 히라시노 게이노, 그리고 가와바타 야스나리, 무라카미 하루키. 일본의 서늘한 감성에  헤어나올질 못했다. 만나면서 그냥 알게 되던게 있던가.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벌써 와 버린 느낌. 내게 일본의 문학이 그랬다.


작년부터 대본을 쓰면서 대사와 지문을 어디까지 배우들이 해석하여 연기할까, 를 고민했는데 동화극이다보니 1차원적으로 직접적인 행동과 표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친절하게.  그런데 고레에다 감독의 마지막 지문을 읽고는 나는 와르르 무너졌다. 나의 해석의 여지 없는 지문들이 오히려 연출과 배우들에게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했다.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나는 그 장면을 설명하지 않고 쓰고 싶은 만큼 문학적으로 그려내면 된다. 지금 창밖에 보이는 주저앉는 슬리퍼를 신고 신호등을 건너는 왼쪽 어깨가 조금 처진 그처럼, 어디로 걸어가는지 정처없이 슬리퍼를 끌고, 더 주저앉아 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는 시점까지. 조명은 어두워지고 커튼은 닫힌다.


 어떤 작가, 어떤 감독을 일생에 알게 된다. 고레에다를, 김애란을 알아간다. 곱씹고 따라 쓰고 읊조린다. 어느 지점이라고도 할 수 없는 부분에서 눈물은 터진다. 질투하거나 부럽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경이롭다, 말없이 우러르며 감사할 뿐.


“해 질 녘 두 가족은 실루엣이 되어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부모인지 알 수 없었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운데, 맡겨진 글을 쓸 수 있다는  벅찬 기분이 교차하는 점심시간의 한 켠.  병원 아이들에게 했던 말처럼 생은 살아갈수록 기대보다 더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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