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복작이는, 더는 방치하기 힘든 아이들을 데리고 오락실로 향한다. 벌레들을 향해 신나게 총질을 해대고, 오랜만에 아내에게 이름을 알지 못하는 예쁜 보라색 꽃을 선물한다.
부천역 이곳저곳에는 유튜브 1인 방송을 하는 노숙자, 젊은 문신 커플들이 '날 좀 보세요'하며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다. 모두들 코로나로 답답한 자신의 삶에 보상을 받기나 하듯 나른한 자신만의 오후를 즐긴다.
그 가운데 낯선 흑인, 그리고 낯선 문구.
"Stop, Killing Us!"
아! 이 시간 자신이 아닌 누군가의 죽음을 기억하는, 그리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구나.
코로나의 선재 대응에 전 세계로부터 후한 점수를 받은 한국은 마치 최고의 국가, 국민이 된듯한 우쭐함을 느낀다. 그리고 속으로 은근히 속삭인다.
'하하, 세계 최고라고 자부하던 미국이 허둥대는 꼴이란, 그 불협화음이란'
'이에 비해 이렇게 질서를 잘 지키는 한국 국민들의 힘을 보라!'
미국은 마스크를 쓰는 것에서부터 정부를 비판하고 의견이 갈린다. 한국은 정부의 마스크 쓰기, 거리두기에 질서 정연한 모습이다. 마치 길거리 축구경기 관람 후 쓰레기 잘 줍는 것이 세계적인 선진 시민의 증거인 것처럼.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의 가장 큰 힘중 하나는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오합지졸이고 '이런 사태에도 딴소리를 하는' 저급 시민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없는 그것은 "이러한 상황에도 나의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자유"이다.
코로나가 진행되면서 모든 관공서는 문을 닫았다. 공원도 마치 사건사고라도 일어난 것처럼 공사장 띠가 둘러졌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공원과 도서관 출입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바다로 떠나고, 주말이면 고속도로는 정체다. 학교는 형식적인 (사실 시수를 채워 나중에 따로 수업을 안 해도 될 만큼의) 온라인 수업에 연장이고, 아이들은 한 시간 만에 수업을 끝내고 PC방과 길거리를 삼삼오오 배회한다. 한데 이상한 점 하나.
"그 누구도 시위를 하지 않는다!"
우리는 왜 코로나로 사람들이 집 밖을 나가지 않아 '노인들의 병이 더 심각해지고, 우리 아이들이 비만이 되어가고, 우울증이 더 심해지고, 유독 하류층의 수입만 줄어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가? 코로나 감연은 미래의 확률적 가능성이지만 오늘의 삶은 견뎌내야 할 현실 아닌가? 어느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인가? 아니 무엇이 더 중요하기 이전에 왜 아무런 논의나 시위가 일어나지 않는가?
며칠 전 쿠팡 기사가 죽었다. 이 일은 처음이 아니다. 불과 몇 달 전에도 쿠팡 기사가 죽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쿠팡을 통한 바이러스 전파경로를 마치 스릴 있는 드라마를 보듯 바라볼 뿐 그들의 죽음을 생각할 여유는 없다. 우리는 단지 "점점 빠른 배송, 더 싼 배송"을 원할 뿐이다. '그들은 자기 돈을 더 별려다가, 자기 욕심이 부른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쩌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우리의 욕심 때문 아닌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고 말하지만, 정작 문제는 "자본을 만들 내기 위해 노동을 쥐어짜는 경제적 구조"와 이를 "바보처럼 따라가는 우리" 아닌가?
미국 흑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일어났다. 이는 단지 플로이드 사망에 대한 책임만을 물으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흐름으로 격화된 심각한 양극화와 1970년대 루터 킹 목사와 비폭력으로 쟁취했던 흑인 인권의 후퇴를, 그 구조적 문제점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는 세계화,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던 세계 경제를 공격하고 그 실체를 드러내 보이고 있다.
지금은 말 잘 듣는 (마치 독재의 후손임을 증명하는) 시민의식을 자랑할 때도, 코로나 감염에 덜덜 떨며 모든 일들이 침식되는 것을 구경할 때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현실의 적나라한 실체를 바로 보아야 한다.
그 구조적 한계를 보아야 한다. 나 자신만이 아닌 우리(Us)를 봐야 한다. 그 한계를 깨부수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 그리고 한 발걸음을 떼어야 한다. 그 시작은 다 함께 외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