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중독이 되어가는 과정
우리 할머니에겐 토요일 루틴이 있으니, 바로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내가 이사오기 전까지 할머니는 같은 동네에 사시는 이모할머니 할아버지와 목욕을 다니셨다. 그보다 더 전에는 할머니보다 각각 2살, 4살이 어린 동네 동생들과 버스를 타고 대전으로 목욕을 다니셨다. 하루 종일 목욕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돌아다니는 삼총사였다. 그러다가 2살 어린 동생이 무릎이 아파 더 이상 돌아다니지 못하고 집에만 계시게 되면서 삼총사의 목욕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마침 이모할아버지가 운전면허를 반납하신 시점이 내가 이사 온 시점과 맞아떨어져, 할머니의 토요일 루틴은 지켜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사실 목욕탕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우선 어렸을 때부터 우리집은 목욕탕을 자주 가는 문화가 아니었고, 목욕탕만 다녀오면 왜인지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말엔 늘어지게 늦잠 자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게 나에겐 휴식이자 회복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완강했다... “목욕을 안 가는 사람이 어딨어” (저 여기 있는데요...) 늦잠이라도 자는 날이면 “당근아 목욕 가야지!”하며 거실을 서성거리는 할머니의 들뜬 에너지가 내 방 침대로까지 전해져 늦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전 목욕탕-식당에서 점심 식사-(가끔 미용실)-집
이것이 할머니의 토요 루틴이다. 따라서 오전에 늦어도 11시 전에는 목욕탕으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세수도 안 하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목욕바구니를 챙긴다. 할머니는 노랗고 긴 때수건으로 감싼 작은 샴푸통과 갈아입을 옷이 담긴 작은 천가방을 들고 뽈뽈뽈 빠른 걸음으로 나보다 앞서 집을 나가신다. 이것이 나의 효도라고 생각하며 차에 시동을 켠다.
빵집 사장님이었던 할머니는 스몰톡에 능하시다. 목욕탕에 가면 평소보다 한층 더 밝아지시는 할머니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거신다. 목욕탕에서 나오는 사람에겐 ”목욕탕에 사람 많아요?” 탈의실에서는 “아이고 아기 이쁘다.” 탕 안에서는 “어디서 오셨어요?” 갑자기 자기소개도 하신다. ”나는 나이가 구십 셋이에요.“ 허리도 꼿꼿하고 정정하시다며 놀라는 분들에게 할머니는 이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이제까지 건강 주시고 지켜주셨어요. 예수 믿으세요?” 할머니의 스몰톡은 가끔 스몰톡의 경계를 넘는다. 나는 할머니가 (말 그대로)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 같다. 출동이 필요할 땐 할머니 팔을 손바닥으로 찰싹 치며 “할머니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예요” 하고 단속한다. 다행히 아직도 할머니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 세상은 살만하고 따뜻하구나.
목욕탕은 이제 나의 토요일 루틴에 스며들어 목욕을 가지 않으면 찝찝한 상태가 되었다. 효도라고 생각하며 시작했던 것이 나의 취미가 되었다. 내 목욕바구니는 점점 화려한 아이템들로 채워지고 있다. 두피 마사지 빗, 괄사, 스케일링 샴푸, 바디 스크럽... 작지만 컴팩트하게 모든 물건을 담아냈던 내 목욕바구니는 이제 자꾸만 물건들을 토해낸다. 새로운 목욕가방을 사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목욕을 가기 전 날엔 어떤 음료를 텀블러에 넣어갈지 미리 생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잠이 든다. 이번 주는 얼음을 잔뜩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서 가져가야지.
하지만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건 할머니가 나를 열탕에 집어넣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온탕에도 오래 들어가있지 못할 정도로 답답한 걸 잘 못 참는데, 할머니는 꼭 온탕에 있다가 열탕으로 넘어가신다. 열탕은 정말 어마무시하게 뜨거워서 여기에 얼굴만 밖으로 내놓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인데, 할머니는 나를 그 열탕에 자꾸 들어오라고 하신다. 할머니 목소리는 얼마나 큰지 “당근아 여기로 들어와!!!” 하면 모든 열탕 사람들이 온탕에 앉아있는 나를 쳐다본다. “할머니 너무 뜨거워요. 전 여기가 좋아요.” ”하나도 안 뜨거워. 들어와.“ ”전 뜨거워요.“ ”당근아!!! 들어와!!!“ ”할머니도 나오세요, 너무 뜨거운 데 오래 있으면 안 좋아요.” 탕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한편의 미니 연극을 선보이며 할머니와 실랑이하는 건 매번 적응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