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극복기 2
내 유학생활엔 두 번의 전환점이 있었는데.. 첫째는 운전을 시작한 것이고, 둘째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우울증 워크샵에 배정되었을 때 매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1) 규칙적인 수면 2) 규칙적인 운동 둘 중 하나를 지키는 것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평생 내가 동경해 온 생활 패턴이지만 체질상 쉽지 않았던 나는 상대적으로 쉬운 규칙적인 운동을 택했다. 그때부터 학교에 있는 짐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다닌 학교는 Graduate Assistanship으로 일을 하면 등록금을 면제해 주긴 했지만 매 학기마다 내야 하는 term fee라는 것이 약 1000불 정도 있었다. 학교 시설 이용료 정도로 보면 되는데, 이걸 면제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분할납부 형식으로 매달 GA를 하고 받는 생활비에서 term fee를 냈다. 코로나 때에도 term fee를 면제해 주거나 깎아주는 것 없이 고스란히 내서 정말 아까웠는데... 학교 헬스장을 이용하면서부터 드디어 이 term fee의 뽕을 뽑게 됐다.
우리 학교는 헬스장이 꽤 잘 돼있는 편이었는데, 이걸 학생이라면 무료로 이용할 수가 있었다. 2층 규모로 널찍한 데다가 실내에 달리기를 할 수 있는 트랙도 있고, 기구도 정말 다양하게 있고, 관리도 잘 돼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 한 3년 동안 그 짐을 한 두 번밖에 가보지 않았었다. 그 한 두 번 갔을 때 개운해지기보다 피곤해지고, 그 피로가 며칠을 가게 되자 나는 더 이상 짐을 가지 않았다. 운동을 하면 체력이 좋아져서 공부를 더 오래 할 수 있어야 되는데, 처음 몇 번 운동을 할 때 이후에 너무 피곤하고 생산성도 떨어지니까 체력이 좋아질 정도만큼의 운동량을 쌓기도 전에 운동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학위고 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우선이 된 나는 매일 짐에 가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이 되었을 때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오로지 운동에만 집중했다. 처음엔 음악도 안 듣고 그냥 눈을 감고 숫자를 세면서 운동을 하다가, 점차 잘하고 싶으니까 유튜브로 여러 기구 사용법을 익히게 됐다. 나중엔 운동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도 따로 만들었다. 예전엔 운동하는 나를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다는 자의식 과잉도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운동을 해보니 다른 사람을 쳐다보는 경우는 저 사람이 언제 저 기구를 다 쓰는지 확인하고 그다음으로 내가 기구를 쓰려고 기회를 노릴 때였다. 실제로 인기 운동기구를 쓰고 있으면 몇 세트 남았냐고 "How many sets do you have left?" 하고 사람들이 물어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운동을 하면 좋은 점은 잡생각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머릿속에 생각이 떠다니는 스타일(mbti N)로 멍 때리는 걸 못하는데, 무거운 무게를 들어야 하는 운동을 할 때에는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해야 하고, 숫자를 세야 하니까 잡생각이 사라졌다. 마치 명상과도 같은 효과였다. 그래서 우울감이 들거나 자꾸 스트레스받는 생각이 들 때에는 침대에 눕거나 유튜브로 도피하거나 하기보다 그냥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짐으로 향했다. 그렇게 운동을 한 1시간 정도 하고 나면, 상황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우울감은 훨씬 덜해졌다.
또 하나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강해지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 남부는 굉장히 가족중심적이기 때문에 내가 싱글이라는 사실에 대해 의식을 많이 하게 됐다. 특히 코스트코에서 장을 볼 때 이게 가장 심했는데, 코스트코에 가족 단위로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장을 보는 일련의 과정에서 내 체력 소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코스트코의 대량 식품들을 카트에 담고, 계산을 마치고 차 트렁크에 싣고, 그걸 또 내려서 집으로 갖다 놓고 하다 보면 그날의 체력이 다 소진 돼버렸다. 이럴 때 나보다 힘센 남자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코스트코에서 500ml짜리 물병 여러 개가 있는 세트를 힘겹게 카트에 담고 있는데, 딱 봐도 운동 마니아일 것 같은 어떤 여성분이 너무 가벼운 몸짓으로 같은 물병 세트를 거뜬히 본인 카트에 담는 것이다. 그분을 보고 나는 혼자 살려면 무거운 걸 잘 들어야겠다, 그리고 무거운 걸 잘 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무거운 걸 잘 들어서 할머니에게 칭찬을 듣는다)
몸이 건강해지자 정신도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나중엔 헬스 중독 증상을 보이며 집 근처에 있는 짐에도 따로 등록했다. 아무래도 학교 짐은 학교가 쉬는 날엔 닫고, 주말엔 운영 시간도 짧았기 때문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운동을 하고 싶었다. 미국은 헬스장이 정말 잘 돼있어서, 집에서 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엄청 넓고 기구도 많은 연중무휴 헬스장을 한 달에 20불 정도만 내고 다닐 수 있었다.
이 헬스장 곳곳엔 영감을 주는(?) 글귀들이 붙어있었다. "Resisatnce is not futile (저항은 헛되지 않다)" - 즉 운동할 때 무거운 것을 드는 행위(저항)가 헛되지 않다는 뜻인 것 같다-같은 멋진 글귀도 있다면, 바벨 운동하는 곳에는 "Heavy Metal Rules"라는 약간 병맛 문구가 쓰여있기도 했다. 한 세트를 하고 쉬면서 저 문구들을 독해하고 언어유희를 알아차리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몰랐으면 아쉬웠을, 웨이트 트레이닝이라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무엇이든 버려지는 경험은 없다는 말을 나는 굳게 믿는다. 우울하지 않았더라면 나라는 인간은 아직도 운동이 내 생산성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멀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울했기 때문에 생산성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운동에 매달릴 수 있었고, 결국엔 더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불행인 줄 알았던 것이 복이었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듭니다! 저항은 헛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