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와 <미셸 푸코>
지난 12월 3일 이후 잔잔한 우울감에 휩싸여있다. 만사 의욕이 없다. 그 전에는, 그 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 전에는, 기본적으로 평균 이상의 활력을 갖고 지내는 편이었다. 물론 간혹 무기력해 지기도 하고, 때때로 우울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금새 회복했고, 푹 자고 일어나면, 맛있는 걸 먹고 나면, 다시 활력이 충전 되곤 했다. 그런데, 계엄날 밤 몸을 일으키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방전된 활력이 두달 반이 넘어가도록 도무지 충전되지 않는다. 기분이 가라앉은 채로 일어나고,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고 뭘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된다. 잠들기 전 책을 보던 습관이 겨우 자리를 잡으려던 차였는데 망했다. 밤마다 다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다 잠든다. 악순환이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즈음 미셸 푸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푸코는 근래 내가 접한 그 어떤 텍스트들보다 흥미로웠고, 푸코의 말에 따라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일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희열을 가져다 주기도 했지만 책에서 눈을 떼고 세상으로 돌아오는 순간, 다시 한번 무기력에 빠졌다. 그리고 푸코를 읽으면 무기력은 두배가 되었다. 모든 게 뒤엉켜 서서히 회의주의자가 되어 가는 중이다. 별로 익숙하지 않은 잔잔한 우울감과 평생 함께 해야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전으로 돌아가겠냐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가장 낯선 곳을 여행하며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큼이나 푸코를 읽는 일은 나에게 짜릿한 경험이니까. 한번 눈을 뜨고 그 맛을 본 이상 돌아갈 수는 없다. 새로운 세상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푸코에 대한 글을 써야 할 지, 책에 대한 독후감을 써야 할 지, 실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사실 어디까지가 푸코이고 어디까지가 사라 밀스의 말인 지도 완전히 구분하지 못한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 지에 대한 의심이다. 이제 겨우 푸코에 입문한 사람으로서, 일부분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클텐데 이런 채로 독후감을 써도 될까. 그럼에도 약간 무모한 심정으로 지금 이 독후감을 쓰는 이유는, 나중에 이 글을 다시 읽기 위해서이다. 푸코를 찍먹한 지금의 나는 푸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어떻게 오해하고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건 지금에만 쓸 수 있는 글 일지도 모른다. (꾸준히 공부하겠다는 결심이다)
처음 읽은 푸코 책은 프레데릭 그로가 쓴 ‘미셸 푸코’로, 푸코가 출간한 책과 강연을 따라가며 푸코의 사상을 연대기로 정리한 교과서 같은 책이다. 처음 읽을 땐 문장 하나하나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쉬울 거라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문맹이 된 기분으로 덤불 속을 헤매다 드문드문 눈에 들어오는 문장에 밑줄을 쳤고. 한 챕터를 읽은 후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었다. 이 반복으로 알게 된 것은 읽고 읽고 다시 읽다보면 아무튼 조금은 이해하게 되고 내 것이 한 줌 생긴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독서는 나에게 여가였는데 이제는 노동이 되었고, 이 머리가 뻐근한 기분이 썩 좋았다. 책 한 권이 밑줄 투성이가 되자, 뿌듯한 마음마저 든다. 미셸 푸코의 매력에 조금 빠져들고 있을 때 즈음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를 읽게 되었다.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는 놀랍게도 비교적 술술 읽혔다. 내가 푸코를 예습해서인지! 아니면, 사라 밀스의 글이 어렵지 않게 쓰여졌는 지. 아마 둘다일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책이 부드럽게 잘 읽힌 이유는, 사라 밀스가 나의 입장과 비슷한 방향에 서서 복잡하고 난해한 푸코를 내가 이해하고 싶은 방식으로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피인용율 1위라는 푸코. 어쩌면 나도 세상을 해석하는데, 조만간 푸코를 인용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 이 책이 아니었다면 푸코를 이해하기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미셸 푸코’를 먼저 읽고 ‘현재의 역사가 미셸 푸코’를 읽은 건 꽤 잘한 선택 같다.
푸코를 접하게 된 후, 내가 있는 어항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우리는 어항 속에 있고, 결코 어항 밖에서 우리를 볼 순 없다. 내가 어떤 어항 속에 있는 지 결코 알 수 없겠지만, 적어도 내가 어항 속에 있다는 걸 안다는 것. 어항을 깨부술 순 없지만, 어항에 대해 생각하는 일만으로도, 세상을 좀더 다양한 방식으로 바라보게 된다. 글쓰기 수업을 듣고, 푸코를 공부하기로 한 건, 내가 보는 세상이 지루해서 였다. 그 세상 안에서 내가 쓴 글이 지겨워서였다. 지금까지 봤던 세상을 다시 본다. 지루하게 지나온 세상이 온통 낯설다. 의심스럽다. 이게 요즘 나의 유일한 기쁨이지만 동시에 커다란 슬픔이다. 그래, 그렇다면 이 다음에 어디로 가야할 지 잘 모르겠다. 푸코를 계속 공부하다보면 알게 될까.
계엄 이야기로 시작했으니, 그 이야기로 끝을 맺자면, 탄핵이 인용되고, 정권이 교체되면 좋은 세상이 올 거라고 믿었다. 예전의 나는 그랬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오지 않을 것 같다. 미국에선 트럼프가 다시 대통령이 되었고, 온갖 이해하기 어려운 정책에 사인을 한다. 세계 곳곳에서 이와 흡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투표로 대통령 하나를 바꾼다고 해서 이 시대가 더 좋아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자꾸 힘이 빠진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손을 놓고 있겠단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무튼 희망을 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은 딱 하나뿐인 것 같다. 공부. 그게 희망이고, 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