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 사이먼 스위프트
한나 아렌트에 대해 많이 들었고, 궁금해한 적은 있었지만,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동안 철학은 내가 가까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철학 관련 책을 읽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고 여겼다. 근래 미셸 푸코와 한나 아렌트 등 철학자, 사상가들에 대한 책을 접하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가고 있다. 물론 그들의 직접 저서는 아직 읽지 못했지만, 그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하고, 내 방식으로 천천히 받아들이는 과정이 개인적으론 무척 감동적이다. 말하자면, 이번 생애 절대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한 한라산 백록담을 내 두 발로 걸어 올라간 것 같은 기분이랄까. (아, 한나 아렌트 전작을 다 읽는 날은 올 지도 모르지만 백록담 등반은 불가능합니다.) 매번 쓰는 독후감도 그 역할이 크다. 책 한 권을 읽고 머릿속에 떠다니는 사유에 대해 쓰지 않았다면, 그 사유는 비눗방울 거품처럼 금세 터져 온데간데없이 흩어졌을 것이다. 쓰니까, 비록 그 사유가 보잘 것 없더라도, 뭐라도 되어 나에게 남더라. 이번 독후감은 특히 더 자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쓰는 이유. 독후감이라기엔 한나 아렌트 입덕기인 것 같지만...
최근 몇 주 동안 어딜가나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를 들고다니며 읽고, 영화 ‘한나 아렌트’를 이어 보면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푸코를 읽을 때도 그랬지만, 한나 아렌트는 그보다 조금 더 가깝게 느껴진다. 어떤 말들은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의 말처럼 생생하게 들리기도 하는데, 그건 지금 시대가 한나 아렌트의 말들이 곧장 적용되어도 전혀 어색함이 없는 시대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인가, 그의 사상을 넘어 사람에게 깊은 관심이 생긴다. 한나 아렌트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만일, 한나 아렌트가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했을까? 한나 아렌트는 내 편(이런 표현 밖에 못해 죄송합니다.)일까 아닐까? 아마도 내 편에 가까울 것 같은데,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얘기는 해주지 않는 사람이었을 것 같다. 결코 내가 듣고 싶은 말은 해주지 않는 사람.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는 사람. 오만하고 독선적이지만 언제나 토론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감정이 없어 보이지만, 주변의 친구, 동료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사람. 페미니스트가 아니었지만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용되는 사람. 아, 나의 상상이 가미된 한나 아렌트. 너무 내 타입이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데 능하고, 쉽게 타협하며, 토론을 피하고, 감정 과잉인 나는 주로 그런 사람들을 선망하고 쫒는다.
유대인이고 난민이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아이히만에 대해 쓴 사람. 즉 자기 연민이 없는 사람. 상상력을 가지고 가해자의 생각과 감정을 사유하는 사람. 가해자가 가해자답기를, 피해자가 피해자 답기를 원하는 세상에서 두 가지 모두를 거부하는 사람. 매혹당할 수밖에 없다. 한나 아렌트 식 상상력에 대해, 자기 연민이 없는 통찰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전형과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 같은 것들에 대해 좀 더 공부하고, 사유하고 글을 쓰고 싶다. 지금은 거기까진 역부족. 하지만 저기 백록담이 있다는 걸 알았고 오르고 싶어졌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작은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