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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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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by 정다운


최근 몇 년 사이 가까운 친구들이 배우자를, 동생을 잃었다. 투병의 과정과 가족을 잃고 겪는 고통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가능한 그들이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으려고 했지만, 그럴 때가 많진 않았다. 다만 그들이 남기는 생생한 고통의 기록을 꼼꼼하게 읽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읽고 듣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세상을 떠난 이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직 젊은 여성들이었으며, 생활 습관도 좋은, 선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플 이유가, 떠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질병에는 이유가 없다는 걸 받아들이는데는 시간이 그닥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다면, 나도 언제든 아플 수 있다. 나도 언제든 죽을 수 있다. 여기서 생각이 끝나면 좋으련만, 내가 떠난 후 남는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원래 상실과 관련된 불안이 많은 편인데, 몇배로 커졌다. 몸이 조금만 이상하면 “암인가?” 하는 생각을 골똘하게 하는 버릇이 생겼다. 소화가 되지 않으니 위암인가? 하고 가슴이 아프면 유방암인가? 한다. 소화가 안 될 때는 잦고, 유방은 생리 주기에 따라 자주 찌릿하니. 내내 암인가? 하며 살고 있는 셈이다. 실은 지금도. 그리고 나의 친구들은 감정을 털어놓고 기록하며 여전히 그 시간을 어렵게 지나 보내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들의 말을 듣고 읽는다.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는 동안, 친구들이 자주 떠올랐다. 이 책은 그들에게 위로가 될까?


감정을 글로 쓰는 것에 익숙한 편이다. 주로 읽는 사람이 있는 글이고, 대체로 긍정적인 감정이다. 고운 이야기를 쓰는 나도 종종, 험한 이야기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애초에 필명을 정했어야 해. 필명과 딱히 다를 바 없는 무명작가면서도 그런 생각을 한다. 주변, 특히 가족들의 눈치를 본다. 남들이 보지 않을 글, 가령 일기를 쓰면서도 그렇다. 그러다보면 종종 감정을 미화하거나 지어내기도 한다.


박완서 작가는, 그 당시 이미 유명한 작가였던 그는, 몇겹의 험한 감정을 결결이 적었고, 발표했다. 그것도 고통의 정중앙에서. 그는 왜 일기를 썼을까? 어떻게 해서 그토록 솔직할 수 있었을까? 평생 글 쓰기로 감정을 다뤄 버릇하여, 버릇처럼 쓴 것일까. 작가 자아의 쓰고 싶은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까? 흔치 않은 일을 겪을 때면 기록하고자 하는 충동이 들 때가 있다. 이 특별한 소재를 내가 갖게 되다니 흥분이 되기도 한다. 슬플 때 눈물을 흘리며 셀카를 찍고 눈물 연기를 연습한다는 어떤 배우들처럼. 나의 감정마저 글의 소재로 취급하게 되곤 한다. 이건 어쩌면 직업 정신인가.


박완서 작가는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특유의 수려한 문장으로 감정을 솔직하게 적었다. 그리고 그것은 넋두리나 한탄이 아닌 문학이 되었다. 문장 때문만은 아닐텐데. 고통이 문학이 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한 줄 씩 읽을 때마다 경탄했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이 책의 많은 문장을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면서 나도 부정적인 감정을 솔직하게 쓰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고통을 쓰는 방법을 훈련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내 인생에도 고통이 올 거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이미 오기도 했다. 고통의 크기는 절대적이니까라는 사족을 덧붙인다. 아무튼 어쩔 수 없이, 내 삶을 소재 삼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기왕이면 '좋은 글'로 기록하고 싶다는 욕망을 감추지 않으며, <한 말씀만 하소서>를 필사하겠다고 다짐한다.


여기까지가 쓰는 사람의 감상이었고, 읽는 사람으로서는, 작가에게 감사한다. 그가 그 고통 속에서도 썼기 때문에, 발표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 귀한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걸 안다. 안 썼다면, 못 읽었을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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