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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독노트

혼자 있고 싶어서

<쓰기의 미래>를 읽고

by 정다운


초등학교 저학년 때 처음 그림이 없는 책을 읽었던 일이 기억 난다. (이원수 아동문학 전집이었다) 책에 글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신이 났다. 새로운 책을 읽을 때마다 작가가 누구인지 찾아봤다. 세상에서 작가가 가장 멋있어 보였다. 읽는 게 이렇게 재밌는데 쓰는 건 얼마나 재밌을까? 읽는 게 좋다고 해서 모두 쓰는 건 아니겠지만, 아니, 어떻게 아닐 수 있지? 작가에 대한 환상이 모두 걷힌 지금도 여전히 나는 작가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직업 같다.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매일 생각한다.


어린 나는 왜 읽는 게 좋았을까. 읽는 동안 나는 혼자일 수 있었다. 책과 나만 존재했고, 그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오롯이 혼자 만나는 새로운 세상이 너무너무 좋았다. 쓰는 일 역시 그렇다. 누구의 도움 없이 나 혼자 하는 일이다. 글이 책이 된다면, 편집자의 손길이 들어가겠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평가나 첨삭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 전까지는 글을 쓰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 안에 오직 나만 존재한다. 글을 쓰고 있는 책상 바로 옆에 누가 앉아있다 하더라도, 나는 혼자 쓴다. 사람으로 가득한 지하철에 앉아 책을 읽더라도. 나는 혼자 읽는다. 어디서든 쉽게 혼자가 될 수 있다. 그게 영원히 좋다. 지금도 그렇다. 짝은 실내 자전거를 타며 게임 중계를 보고 있고, 나는 중계 소리가 들리는 어수선한 거실 책상에 앉아 있지만, 나는 혼자다. 이건 거의 초능력과 다름없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초능력이라는 점이 특히 맘에 든다.


글 고치는 걸 좋아한다. 고치고 싶어서 쓰는 것 같기도 하다. 퇴고는 쓰는 일 같지만, 사실 읽는 일이다. 쓰는 동안 무척 자주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내가 쓴 글을 읽는다. 조금전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글을 가장 먼저 읽는 일이 좋다. 거슬리는 게 보이면 곧바로 고친다. 그러면 글은 다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글을 가장 먼저 읽는다... 고친다. 그걸 반복한다. 재밌다.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나뿐이다. 나만 존재한다. 짜릿하다.


지난주 <쓰기의 미래> 수업을 듣는 내내 슬펐다. 다만 그때는 왜 슬픈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조금 알겠다. 읽고 쓰는 기쁨 사라지면 어쩌지. 읽고 쓰는 동안에도 내가 혼자 있을 수 없으면 어쩌지. AI와 함께 읽고 써야한다면, 그건 더 이상 내게 글이 아니다. 글이 없어지면 어쩌지. 나의 초능력이 사라지면 어쩌지. 슬프다.


+

우리는 AI를 마치 사람인양 대한다. “걔가 이렇게 말했어” “AI가 이랬어” 친구 얘길 하듯 말한다. 하지만 AI는 사람도 로봇도 아니다. 그 뒤에는 자본이 있다. AI를 의인화 하는 것이 무척 위험하단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보면 다들 너무 쉽게 “그거 AI한테 맡기면 금방 해요.”라고 말한다. AI 덕분에 우리는 추가 비용 없이 10명이서 할 일을 7명이서 할 수 있게 되었다. 금방하는 건 왜 좋은가? 이전보다 일을 빠르게 한다고 해서 우리의 근무 시간이 줄어드나? 월급이 늘어나나? 우리가 9시에 출근해서 6시에 퇴근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다. AI 도입으로 업무 효율성이 높아졌고, 그래서 사람의 월급이 늘어났단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일하기 편해졌다고 생각한다. 가만 생각해보자. 좋아진 건 회사뿐이다. 회사는 7명의 월급으로 10명분의 결과물을 얻어낸다. 하지만 노동자인 나는, 일하기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에서 태어나 자본주의에서 공부하고 자본주의에서 숨쉬는 사람 답다. AI가 거부할 수 없는 흐름이라면, 이 흐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자본주의나 가부장제처럼, 아주 공고하게 뿌리내려, 그것이 존재하는지 의식조차 못하게 되기 전에 AI에 대해 사유하고 토론하고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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