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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독노트

세상이 엉망이 되어갈 때

<세계 끝의 버섯>

by 정다운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지난봄, 전국적으로 산불이 번지던 시기다. 그때 내가 밑줄 긋고 옮겨 적은 문장은 아래와 같다.


“어떤 소나무는 불에 타야만 열리는 솔방울에 수년간 씨앗을 저장한다. 이 씨앗이 처음으로 접촉하는 것은 잿가루일 것이다.”

“로지폴소나무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타는 것이 아주 나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불이 꺼진 후 새로운 싹이 자라기 때문이다. 캐스케이드산맥 숲의 긴 역사 동안 로지폴소나무가 그 풍경에서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한 가지 방법은 산불을 통해서였다. 그러나 산림청의 산불 금지 방침은 로지폴 숲에 새로운 경험을 선사했다. 그것은 나이 들도록 사는 것이다.”

“숲은 빙하와 화산과 산불이라는 도전에 부활로 응했다. 인간의 모욕에도 부활로 대응했다. 인간은 지금까지 수천 년간 벌채하고, 숲은 부활하면서 서로에게 응대해 왔다.”


검은 산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과 재가 된 동물과 식물과 버섯과 이끼를 떠올리며 절망하던 시기,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때에 이 문장들이 큰 위안이 되었다. 20세기 초반, 미국 산림청이 산불을 금지하자 폰데로사 소나무가 번식하지 못하고 전나무와 로지폴소나무가 번창한다. 로지폴소나무에 잘 돋는 송이버섯은 산림청의 산불 금지 방침 덕택에 퍼져 나간다. 오염된 다양성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모든 것이 망쳐진 것 같을 때도, 이 안에 어쩌면 작은 버섯이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읽는다.

지구 입장에서 보면, 어떤 상황도 완전히 나쁘진 않다. 자본주의가 막다른 철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 같고, 이 기후위기 상황에서 과연 다음 세대는 생존이 가능할까 싶고, 지금도 사람들은 굶어 죽고, 가자에서는 학살이 일어난다. 가해자이기도 하고 피해자이기도 하며 당사자이기도 하고 목격자이기도 한 우리는 그 안에서 한없이 무기력 진다. 그런데, ‘세계 끝의 버섯’을 읽다 보면 희망이 보인다. 숲에서 송이버섯을 발견하는 채집인처럼 희망을 채집한다. 희망을 찾아 밑줄을 긋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이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자본주의의 폐허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기 때문에.

하지만 동시에 죄책감이 든다. 지구에 있는 건 인간만이 아니고, 수많은 존재들이 함께 살고 있으며 (당연하다) 인간도 그중 하나일 뿐이니 오만해지지 말자고, 인류가 까불어 봤자, 우리도 역시 비슷한 세포로 구성된 지구에 잠시 존재했다 사라지는 일개 생명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어쩌면 태만이나 무책임이 아닌가. 내가 망쳐놓고, 이건 가령, 오염된 다양성이야 하며 한걸음 뒤에서 관망하는 건 아닌가. 인간이 만들어낸 이 폐허 위에서 또다시 아득바득 살아보자고 만들어낸 합리화는 아닐까. 책의 메인 카피는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이다. 처음 읽었을 땐 그 문장에 매료되었다. 정말 눈부신 문장이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은 저 문장을 볼 때마다 조금 불편하다. 세상이 엉망이 되어갈 때도 우리는 산책을 하고 버섯을 발견하면 되는 건가? 어디까지가 인간의 책임인가. 어디까지가 오만인가.


이 책은 읽는 것은 어렵진 않았다. 새롭게 해석되는 용어들이 조금 낯설었지만 금세 익숙해졌고, 한 문장 한 문장 부드럽게 읽혔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 내가 읽은 것을 정리하고 요약하고자 하니 막막했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이 꽉 쥔 주먹 사이로 흐른다.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읽은 글은 대체로 구조가 확실했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누군가는 갖은 패치로 이루어진 조각보 같은 글이라고 썼는데, 조각보보다 더 혼란하다. 작가는 우리가 바라보던 방식을 해체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을 다시 읽는다. 구조를 해체하고 그 안의 생명들을 하나씩 확대한다.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책의 구성에 그대로 녹아있어서 읽는 일이 그대로 그 세상을 경험하는 일 같았다. 세계 끝의 버섯을 읽는 일은, 지금 세상을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몹시 특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렇지만, 우리 개개인은 이미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누가 구조를 들여다보는가. 그저 지금 키보드 위 손가락을 의식하고, 점심 뭐 먹지 고민하고, 가을이 본격 시작된다는 백로인데도 이렇게 덥다니 큰일이다 생각할 뿐이지. 흥. 아무튼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며 나는 자꾸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 여기에 동의했다가 저기에 반발한다. 책에 대해 할 이야기가 끝이 없다. 그건 세상을 이야기하는 일이기 때문이겠지. 진짜 매력적인 책이다. 아무튼 독후감을 쓰면서도 여전히 생각이 정리가 잘 안 된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움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나의 생각을 찾아내고자 하는 이 과정이 좀 재밌다. 이 책은 앞으로도 여러 번 반복해 읽어보려고 한다. 그때마다 다르게 읽힐 세상과 내가 궁금하다.


+

지난 봄 세계 끝의 버섯을 읽던 시기, 산불이 심했고, 여전히 탄핵은 되지 않았으며,

저는 (취미)시 수업을 듣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과제로 썼던 시를 공유해 봅니다.


2025년 3월 26일 미세먼지 나쁨


김포제주 기껏해야 한 시간

이코노미석 가운데에 끼어 앉아 팔걸이 싸움을 하다

아 이제 장거리 비행은 못할 것 같아 중얼거리다

30미터 첨탑 위 김형수를 떠올린다.

이보다 좁은 곳에서

발 디딜 데 없는 곳에서

12일째 눕지 못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

죄송합니다.


건너편 건물 옥상의 개를 보며 저기 개를 둬도 되나

곧 더워질 텐데, 비가 오고 바람이 불 텐데.

이렇게 공기도 나쁜데 구시렁거리다

불탄 공장 위 박정혜 소현숙을 떠올린다.

444일째 고공에 있는 사람에 대해.

죄송합니다.


햇볕에 얼굴을 놓고 누운 하얀 고양이에게

너 그러다 얼굴 까맣게 탄다라고 말하다

검은 산과 터전을 잃은 사람들과

재가 된 동물과 식물과 버섯과 이끼를 떠올린다.

죄송합니다.


어떤 것도 더 이상 타지 말아라.


남태령으로 달려간 사람과

광화문에서 경찰을 마주 보고 선 사람

민가를 등지고 불을 끄는 사람

내 말을 좀 들어달라고 높은 곳에 올라간 사람


그리고 여기

작은 소리로

나만 들리게 사과하는 사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뱉지 못하고 삼킨 사과들이 쌓여

목구멍이 욱씬 거린다.


미세먼지 정말 심각하네.

제발 비가 왔으면.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탄핵도 산불도 고공의 사람들도

존재하지 않는 세상 속에 사는 이들 사이를

기웃거린다.

앉을자리가 없네.

산불! 탄핵! 고공! 소리를 꽥 지르고 돌아 나온다.

니들이 놀라든가 말든가


목이 침침해.

휘청 트위터에 들어갔더니

414명의 작가들이 탄핵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고 한다.

아, 그렇구나.

나는 작가가 아닌가. 하다가

응 작가가 아니지 한다.


은행 알림과 카톡 알림이 동시에 온다.

곧 생일이라고 어머니가 용돈을 보내셨다.


마침 청소를 하던 중이다.

나는 청소기 소리를 싫어하지.

위이잉 청소기 소리와 함께 세트로 이어지던 잔소리잔소리잔소리 한숨한숨한숨.

귀를 막아도 들리는 소리소리소리숨숨숨.

지금도 청소를 할 때마다

같이 사는 사람이 이 소리를 싫어할 까봐서

입을 닫는다. 숨을 참는다.

같이 사는 사람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아.

다만 매일 청소를 할 때마다

어린 나를 생각한다. 매일.

나를 본다. 위잉위잉.


저기 내 이야기는 그만.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이 별거 아닌 시라도 혹시나.

기도를 올리자.

시가 기도가 될 수 있다면

이게 기우제가 된다면.


비만 오면 괜찮아질 거라고.

이번 주가 지나면 어쩌면

봄이 와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에게 속삭인다.


아침마다 기분이 안 좋은 남자가

걷기 싫어하는 남자가

식탁에서 등을 구부린 채 아침을 먹는다.


숨이 막힌다.

불이 꺼지면 내 숨도 좀 트이려나.

그때는 이 지긋지긋한 미세먼지도 좀 사라지려나

소화장애도

두통도


어제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도 나도 할 말은 옆자리에 두고

강아지 예쁘단 말만 하고 헤어졌다.


왜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을까 생각하다

오전 9시가 되었고 모니터 앞에 앉아서 아웃룩을 열고

다시 자음과 모음을 이어 붙이는 일을 성실하게 시작한다.

시옷 하나와 이응 두 개와 리을 하나로 만들어진

생일이란 낱말이 싫다고 생각한다.


진작 피었어야 할 집 앞 벚꽃이 피지 않는다.


작년에 제주에는 태풍이 안 왔다.

삼춘들이 말했다.

얼마나 큰 태풍이 오려고 그러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재작년에도 별다른 태풍은 오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큰 태풍이 오려고 그러는 거야.

무서워 죽겠네.

삼춘들은 말한다.

하지만 태풍은 계속 오지 않지.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건 이제 불가능.

태풍보다 무서운 게 많아졌다.


그러니 심호흡을 하자.

아, 죄송합니다.


괴롭다

온몸이 아프다

숨이 막힌다

정말 너무들 한다

트위터를 열고 이런 이야기를 쓰려다 말고

꿀꺽.

쓰던 시로 돌아온다.


산불을 끄던 진화 헬기가 추락했고

지리산으로 산불이 번졌다는 속보가 떴다.


섬은 고요하고.

고양이는 졸고.

나는 사과를 한다.

비가 오길 바라며

마른하늘을 향해

기도를 한다


3월 27일 목요일

전국 시민 총파업의 날

나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글을 써야 해서

파업도 못한다.

또 사과나 하겠지.

배가 살살 아프다.


하필이면 봄이라

하릴없이 봄을

기다릴 수 밖에


좋은 뉴스가 딱 한 줄만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 좁은 길을 따라 봄으로 가겠다. 어떻게든.


아니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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