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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01. 2021

붕정만리

타인의 욕망 아닌 내 욕망을 찾아서

아빠가 붓펜으로 정성스레 한 글자씩 또박또박 적은 종이를 펼쳤을 때, 나는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있었다. 종이엔 붕정만리(鵬程萬里) 넉자가 한자로 적혀있었다. 전설 속 거대한 새는 만리를 날아간다, 원대한 꿈을 향해가는 길은 고단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오랫동안 간절히 꿈꿔왔던 대학생활 그리고 미국이라는 환상을 향해 만리의 여정을 떠나는 나는 무척 긴장되고 두려웠다. 비행기에서 누가 볼세라 뺨에 흐르는 눈물을 연신 훔쳐냈다.



중학교 졸업을 코앞에 둔 겨울 방학 때, 우리 가족은 한 달 동안 미국 여행을 떠났다. 말이 미국 여행이지 실상은 미국 대학 여행에 가까웠다.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교를 시작으로, 뉴욕, 필라델피아에 이르기까지, 미국 동부의 전통 명문대학들을 쉴 새 없이 들렀다. 1월 그 추운 보스턴의 겨울, 수백 년 역사의 고풍스러운 하버드 대학교. 한 대학생을 보았다. 


하버드대학교


바삐 걸어가는 중에도 두꺼운 책을 읽는 어느 하버드 대학생. 그의 모습에 매료되어버렸다. 두꺼운 책이 멋있었고, 그런 책에 얼굴을 파묻고 걸어가는 뿔테 안경의 지적인 모습이 멋있었다. 그런 사람처럼 되고 싶었다. 그리고 대학 생활을 하려면 그런 멋진 곳에서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난 속으로 다짐했다. 나중에 대학 생활은 꼭 미국에서 할 거라고.



'난 미국 대학을 가겠어' 미국 여행을 다녀온 후 엄마 아빠에게 통보했다. 7막 7장의 홍정욱처럼 미국 고등학교는 못 가더라도, 대학만큼은 미국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 아빠는 잘 생각했다고 했다. 사나이는 큰 꿈을 가져야 하고 부모로서 내가 꿈을 이루도록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하겠다고 하면, 그 지원의 제한이 없었다. 학원을 다니겠다고 하면 돈을 줬고, 내가 필요하다면 좋은 노트북도, 비싼 과외선생도 붙여줬다. 그리고 말도 안 되게 비싼 미국 사립 대학을 가겠다고 했더니 그것 마저도 흔쾌히 오케이였다. 진짜 내가 미국 대학에 덜컥 붙었을 때 분명 비싼 학비에 겁도 났을 거다.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다른 대학들을 집어치우고, 더 좋고 더 비싸고 더 이름 있는 학교, 세상의 중심에 있는 학교를 가라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학교 유학반을 찾아갔고, 미국 대학 준비를 시작했다. 내신도 잘 봐야 하고 미국 수능도 잘 봐야 하는데 거기다가 동아리, 봉사 활동, 수상 같은 것도 중요해서 열심히 했다. 고등학교 영어는 이미 그 수준을 넘어버려서 영어 시간에는 영어책 아래에 미국 수능 준비서를 펼쳐놓고 공부했다. 다른 과목들은 내신 관리를 또 잘해야 해서 나름대로 계속 공부를 해야 했다. 수능 모의고사를 치는 날이면 하루 종일 학교 도서관에 처박혀서 자체적으로 미국 수능 모의고사를 봤다. 방학이 되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미국 수능 학원을 다녔다. 잠은 고시원에서 최소한의 시간만 자고 낮에는 학원에서, 저녁에는 고시원에서 공부했다.



나는 남녀공학 고등학교를 다녔다. 친구들이 서로 연애도 하고 난리였는데, 나는 3년 내내 연애를 안 했다. 할 줄도 몰랐고. 왜냐하면 나는 그들처럼 그저 그렇게 평범한 존재가 아님을 멋지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았다. 공부하기 싫은 것도 참았고, 한국 대학 가면 편할 텐데라는 내 안의 타협도 참았고, 학교 선생들의, 친구들의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일그러진 표정도 꾹 참았다.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버텼다. 저녁 10시 야자가 끝나고 집 근처 독서실에 도착하면 10시 45분. 맥심 커피 한잔과 함께 다시 공부를 시작해서 정지영의 스위트 뮤직박스를 지나 신해철의 고스트 스테이션이 시작될 때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6시 15분 기상 후 학교에 도착하면 오전 7시. 그 높은 언덕길을 올라 다시 같은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버티고 참으면 찬란한 미래가 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한 번의 날개 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가는 붕鵬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버티고 참으며 도착했다. 붕鵬이 될 둥지. NYU. 대학교 1학년, 대부분이 그렇듯 나 역시 이제 뭘 해야 하나, 무슨 전공을 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빠는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으면 경제를 공부하라고 권했다. 우리 국민들이 경제를 몰라서 IMF도 터졌다고 했다. 그래서 경제를 배워 투자은행을 가도 좋고, 대학원을 가도 좋다고 했다. 난 아무 생각 없이 그 말을 따랐다.


뉴욕대학교


하지만 경제학 공부는 이상과 달랐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수요와 공급 그래프를 그리고 그 넓이 계산이나 하는 거시경제 입문을 지나 중급 경제로, 경제개발론으로 쭉쭉 진도를 빼다 보니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헛짓거리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그래프 속 선과 선이 만드는 공간 속에도, 이자율과 환율 관계 속에도 사람은 없었다. 명료한 공식과 그를 위한 단순한 조건밖에 없었다. 경제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애초에 잘 꾸며진 실험실 안에 변수를 바꿔가면서 그 영향을 비교하는, 보통의 인간들에게는 그 어떠한 가치를 주지 않는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방황이 시작되었다.

 


스탠리 큐브릭과 마틴 스코세지 작품을 다루는 미국 1970-80년대 영화 수업을 좋아했다. 성경부터 니체까지 이어지는 서양 철학 수업도 어려웠지만 즐거웠다. 한국 근현대사를 해부하는 역사 수업도 경제학 수업과는 차원이 다른 재미를 느꼈었다. 3학년 말에 재미로 듣기 시작한 컴퓨터 프로그래밍 수업에서는 왜 이걸 이제야 시작했을까 후회가 막심했다. 당연히 성적도 경제학과는 비교가 안되게 좋았다. 



전공인 경제학에서 말아먹는 바람에 학점은 개판이었다. 전설 속 새, 붕鵬이 되기 위해서는 높은 학점을 유지하는 게 필수라 여겼지만 2학년이 지날 때쯤에 이르러서 난 전설의 새가 되긴 힘들겠다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지금 보니, 오랫동안 꿈꿨던 전설의 새는 붕鵬이 아니라 바보였다. 불만 없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경제학 공부하고, 학점도 좋아서 투자은행을 갈지 대학원을 갈지 선택할 수 있고, 비싼 차에 비싼 양복에 이쁜 여자를 만날 수 있고, 친구들한테 인기도 많은데 돈도 잘 버는 전설 속 새.



그런 전설이 되고 싶었다는 게, 내가 오래도록 꿈꿨다는 전설이란 게 고작 그 따위였다는 자각에 힘들다. 겁 많고 무비판적이었던 나였구나. 세상 사람들의 욕망에 기어들어가 숨어서 안도하고 싶었던 나는 무책임했구나. 붕의 욕망은 비록 부모가 심었다 하더라도 나는 붕을 거부할 수 있었다. 분명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붕이라는 그럴싸한 이미지 뒤에 숨은 세속적인, 바보 같은, 비인간적인 욕망을 움켜쥐고 있었던 건 나다. 붕은 최소한 고상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세속적 성공을 이룬 세속적인 비즈니스맨의 모습이었을 뿐. 



아.. 지난 세월 날 가두고 괴롭혔던 붕에게 이제는 이별을 고해야겠다. 그의 실체를 알았으니 이제 붕은 더 이상 전설 속 새가 아니다. 전설 속 새가 아니기에 만리를 날아갈 일도 없다. 독서실에 갇혀 책상에 엎드려 이마가 벌게지도록 자다가 새벽 2시가 다되었다는 사실에 놀라 집으로 뛰어갈 필요도 없다.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갇혀 졸린 눈을 비비며 미국 수능을 준비할 필요도 없다. 만리를 떠나 미국에서 대학을 다닐 필요도, 이유도 없다. 다른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속적 성공을 향해 온 몸 바쳐 뛰어갈 일도 없다. 지금 이곳의 사소한 행복을, 즐거움을 꾹꾹 참아내며 고통의 심연 속으로 잠영한 채 이렇게 조금만 견디면 더 좋은 날이 올 거라며 위안, 아니 자기기만할 일도 없다. 거짓된 세속적 욕망을 심어주었다는 이유로 부모를 원망할 일도 없고, 과거를 회한할 일도,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할 일도 없을 거다.



20년 전 부모는 나를 전설 속 새 등 뒤에 태웠다. 하지만 나는 이제 전설이 되고 싶지도 않고 대단해지고 싶지도 않다. 그건 내 것이 아닌 그들의 욕망이었으니까. 나는 전설 속 새가 되는 것도, 부모의 욕망, 사회의 욕망에 충실한 일꾼이 되는 것도 거부한다. 나는 이제 내 욕망, 진짜 내 욕망을 따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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