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9살이었을 때 가장 아꼈던 건 자전거였다. 하지만 어느 날 자전거를 도둑맞았다. 이젠 희미하지만 몇 날 며칠을 울고 불고 했던 기억이 난다. 늘 대문 안쪽 한편에 세워져 있던 자전거가,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곳으로 언제든 탈 수 있는 대상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는 것, 원래부터 내가 갖지 않았던 것이 다시 갖지 않은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이 이 사건의 꾸밈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난 그때를 최초의 상실의 경험으로 기억한다.
나는 자전거를, 아니 그 자전거를 너무 좋아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좋아했던 자전거를 상실했다는 것, 상실로 인해 한동안 슬퍼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자전거가 없어졌다는 것만이 엄연한 사실이고 자전거를 좋아했다는 것, 자전거를 잃고 슬퍼했다는 것은 엄연한 감정이다. 그러니까 사건의 기억에는 사실과 감정, 두 개의 축이 존재하고 사건이 기억되는 방식은 사실과 감정의 상호작용, 특히 현재 감정과 과거 감정의 상호작용이다. 또한, 사실은 부동이고 감정은 유동이다. 즉, 자전거가 없어졌다는 사실 그 자체는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전거를 '상실'했다는 의미부여, '상실은 슬픔'이라는 유동적인 의미에 유동적인 감정을 '고착'시키는 것, 유동적인 의미에 고착된 유동적인 감정을 '기억'한다는 현상은 어쩌면 기억이란 현상은 유동성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즉, 기억은 유동하기에 그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만약 나는 자전거를 상실해서 슬펐다는 감정으로 그 사건을 '기억'하는 반면, 어느 누군가는 남에 집 안에 있던 자신의 자전거를 되찾아서 기뻤다는 감정으로 '기억'한다면, 과연 이 사건에 사실과 감정 너머 진실은 무엇인 걸까? 내게 상실로 기억되는 무엇이, 누군가에게는 획득으로 기억될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사건의 본질은 상실인가 획득인가? 내게 상실이 누군가에게 획득이라면, 내게 실재적 상실은 획득의 예고이자 획득의 잠재성인 것이고 누군가에게 실재적 획득은 상실의 예고이자 상실의 잠재성이 아닌가?
기억은 그 자체로 사실이 아니기에 객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기억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 자체만으로 사실인 것도 진실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기억은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슬픔으로만 기억되는 것이 어떤 조건, 어떤 마주침에 의해 기쁨으로 전복되기도 하고, 기쁨으로만 기억하는 것이 어떤 조건과 마주침에 따라 슬픔으로 전복되기도 한다. 감정이 전복될 수 있으니 기억과 사건 역시 전복될 수 있다. 슬픔은 기쁨의 잠재성이고, 기쁨은 슬픔의 잠재성이기에 기억 그리고 감정은 유동적이며 그만큼 유한하지 않다. 다만 현재의 감정, 현재의 나만큼, 현재의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만큼 유한할 뿐이다.
그래서 기억은 언제나 재발견되어야 하고 언제나 재발명해야 한다. 고고학자, 역사학자의 과업처럼 말이다. 역사는 매 세대마다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의 뜻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