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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16. 2022

언어라는 감옥

아버지가 자주 사용하시던 단어는 "당연히"였다. 내가 어떤 질문을 하면 아버지는 "그것은 당연히 그러하다", "그것은 당연히 그러하지 않다", "당연하지!"와 같은 답변을 자주 하셨다. "당연"이 그의 말에 등장하는 빈도는 그가 나이 40에 가까웠을 때나 70을 바라보는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언어로 표현되는 그의 세계에는 "당연함"의 개념이 큰 축으로 자리 잡고 있나 보다. 내 세계의 바탕에도 "당연함"이 있다. 내가 아버지의 세계관을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계승해왔는지 돌이켜본다.



먼저 당연함이 무엇인지 그 뜻을 찾아보자. 당연하다의 뜻은 "일의 앞 뒤 사정을 놓고 볼 때 마땅히 그러하다"이다. 즉, 원인과 결과가 이치에 맞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치(理致)란 "사물의 정당한 조리(條理, 말이나 글 또는 일이나 행동에서 앞뒤가 들어맞고 체계가 서는 갈피)”를 뜻한다고 한다. '조리'가 실생활에 친숙한 단어는 아니므로 이걸 원리(原理, "사물의 근본이 되는 이치")로 대체해도 무방해 보인다. 그렇다면 체계는 무엇인가? 체계는 "일정한 원리에 따라서 낱낱의 부분이 짜임새 있게 조직되어 통일된 전체"라 하고 갈피는 "일이나 사물의 갈래가 구별되는 어름"이라 한다.



순전히 호기심에 시작했지만, 당연하다는 단어를 따라가다 보니 단순하고 가벼운 뜻이 아니다. 당연하다의 단어 뒤에는 원인과 결과, 이치와 원리, 체계와 통일의 개념이 모두 있는 것이다. 굉장히 흥미로워지는데, 누군가 무엇을 보고 "아, 저것은 당연하지!"라고 말하거나, 쓰거나,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그는 저것 뒤에 원인과 결과, 이치와 원리, 체계와 통일을 알게 모르게 긍정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반대로 "저것은 당연하지 않아"라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 이치와 원리, 체계와 통일을 깡그리 부정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 기준으로, 그 기준의 중심점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채 판단하는 것이므로 여전히 그것들 모두에 포섭되어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무언가를 당연하다, 당연하지 않다고 하는 것 이전에 무언가가 당연하다고 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것인가? 어쩌면 당연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닌가? 사물과 사건이 있고 이에 대한 인식이 있으며 그다음에야 비로소 언어가 있고 이로 인해 사물이나 사건의 원인과 결과, 이치와 원리, 체계와 통일에 근거한 판단, 이 순서가 더 이치에 맞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언어라는 누빔점, 체계 이전에 존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가?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서서 할 말이 없어졌던 것, 코스타리카 밀림을 뚫고 달리며 눈물 흘렸던 것, 태평양을 끼고 남쪽으로 내달리다가 고원의 바람 속에 마추픽추를 그저 내려다봤던 것, 온갖 뚱딴지같은 생각에 괴로워하다가 널 보자마자 미소 지었던 것, 네 품 속의 온기, 그 안에서 네 눈동자를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던 것. 그 시간과 공간에 언어가 있었던가? 그것은 언어 이전에 인식이 아니었던가? 인식은 언어보다 앞선 게 아니었던가? 주체도 대상도 언어로 표현할 수도 표현될 수 없는, 언어 너머의 무언가, 언어보다 큰 존재, 그 인식 안에 무언가가 아니었던가?



분명 존재는 인식과 언어에 앞선다. 존재는 당연한 것을 말하면서 당연하지 않은 것 역시 암시하지만 존재는 당연하지도 당연하지 않지도 않다. 존재는 당연이라 하는 것, 원인과 결과라 하는 것, 이치와 원리, 체계와 통일이라 하는 것 이전에 이미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인식의 한 수단, 한 체계, 한 표현일 뿐 인식 그 자체도 전체도 아니다. 언어는 존재의 전체를 포착할 수도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되려 존재의 인식은 존재로부터 언어를 앗아간다. 존재의 현현은 언어의 존재를 더 이상 인식하지도,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눈앞에 컵 하나가 있다고 하면 컵이라는 단어 이전에 그 존재는 이미 있다. 신체는 감각으로 그 존재를 인식하고 나서야 그것에 노랗다, 작다와 같은 갖가지 언어를 더하며 여기에 관념은 노란 은행잎을 연상하고 기억은 책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노란 은행잎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전에 인식을 조금 더 늘려보아야 한다. 이를 테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컵 뒤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컵에서 흙을 볼 수 있는가? 한때 불이었던 것이 바위가 되고 영겁의 시간을 지나 흙이 되어 물을 만나고 손을 만나고 불과 열을 만나고 도료를 만나고 상자 안에 있다 바다 건너 내 앞에 현존함을 볼 수 있는가? 그 안에 시간의 응축을 볼 수 있는가? 컵이 이런데 자연 만물은 어떤가, 자연이 이런데 너는 어떤가? 실로 놀랍지 않은가?



참된 인식 이전에 조급한 언어화, 언어가 곧 인식의 전부가 되는 것, 언어에 판단에 사로잡힌 인식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러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다"와 같이 판단하는 언어는 동시에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미지를 그 이면에 투사하고 “그러므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정말 나는 "이런 사람"인가? 그리고 지금 그렇다고 미래에도 "이런 사람" 이겠는가? 정반합은 일시적일 뿐 고정되지 않는다. 정반합은 그 지속과 반복의 구조 안에서 빛을 발한다. 일시적인 의미에 고정성과 영원성을 부여하는 구조에 스스로를 가둔 그는 얼마나 자신의 세계를 구속하고 제한하는가?



마찬가지로 "너는 이런 사람이다"는 얼마나 위험한가? 이러한 언어는 "너는 이래야 한다"라는 암묵적인 판단을 낳고 그것에 부합하는 것, 부합하지 않는 것을 분별하고, 또 그것은 각각의 판단, 또 각각의 분별로, 인자가 결과로, 결과가 다시 인자가 되어 재귀 함수처럼 끊임없이 이어진다. 언어가 인식의 한 방편이 아닌 판단 작용 전체로 기능할 때 언어는 대상과 인식을 먹어치운다.



나는 이런 사람이기도 하고 이런 사람이 아니기도 하다.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가 이런 사람이 아니기도,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가 이런 사람이기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너도 그렇다. 세상 만물이 그렇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정된 상이 없어 무상하다. 무상하기에  어떤 것도 아니고  어떤 것이기만  것도 아니며  어떤 것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므로  어떤 것도   있는 것이다. 무상한 것을 가두는 것은 유한한 언어, 유한한 언어로 제한된 인식이다. 무상한 것을 찰나의 , 아집의 상으로 결정짓고 고정하는 모든 시도는 덧없다.



고요 속에서 그저  바라본다. 오래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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