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말이 모두 맞다. 정확히 짚었다. 난 괜찮지 않다. 괜찮지 않지만 괜찮은 척하고 있는 것 역시 맞다. 무언가 깨달은 척 하지만 깨달은 것도 없으면서 그것마저 자랑스레 전시하고자 하는 이런 헛된 짓,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글을 어떻게 맛깔나게 구성해서 공개할지 구상하는데 여념 없는 이것 역시, 얼굴 없는 이들, 나와 전혀 무관한 이들에게조차 빈 껍데기 같은 관심을 받으려 하는 짓임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 짓거리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내가 아직 정신 차리지 못했거나 삶에 닥친 위급함, 엄중한 위기의식 같은 것이 희미하기 때문이겠지. 또는 그것을 알면서도 예전 버릇처럼 그 어떤 곳도 아닌 어느 곳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것. 또는 오랜 오만함 같은 것이겠지. 어쩌면 그렇게라도 해서 괜찮고 싶은 걸지도, 괜찮아 보이고 싶은 걸지도, 괜찮다는 소릴 듣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 괜찮을 리 없다. 괜찮을 수 없다. 애새끼 같은 내 징징거림을 받아줄 사람은, 이런 날 똑바로 봐줄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돌아보면 나보다 약하고 살펴보면 나보다 불운하다. 심지어 그들의 불행은 내가 가히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그들 앞에 선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입 벌려 혀를 나불대긴커녕 고갤 끄덕거리는 것조차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난 얼어붙고 마니까.
2주 전 서점 신간 시집 코너에서 어느 노신사가 내게 인살 건넸다. 한참을 멀찌감치 뒤에서 지켜보니까 나를 시 좋아하는 청년이라 생각했다더라. 그럴 지도. 아무튼 내게 시집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시집을. 처녀작이자 유고작이라 했다. 난 직접 사서 읽겠다고 끝끝내 사양했다. 왜냐하면 난 그가 잡상인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시인은 꼭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책 표지 저자 소개에 사진은 딸이 함께 여행 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찍어주었다고 했다. 그것이 제 영정 사진이라 했다. 온몸에 암이 퍼져 6개월도 남아있지 않다고. 그래서 받아 들 수밖에 없었다.
아.. 절박함이란 이런 것일까. 스러져가는 몸을 딛고 네 앞에 서고 싶은, 그렇게 자신의 것을, 자신의 마지막이었던, 아니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은. 알지 못하는 이에게도 제 것을 선물하고 싶은 것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생의 마지막 불꽃을 건네주는 것은. 그의 시집 제목처럼, 반짝이는 너에게.
그래서 부끄러워졌다. 난 그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 활활 피어나는 생의 불꽃을 나는 아직도 모르기 때문에. 이글거리다가 사그라들다가 다시 이글대며 눈앞에 나타나고야 마는 빛줄기를 아직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눈 멀 것 같은 그곳, 그 밝은 대지를 똑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주접거리는 건 잘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은 잘한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난 아무렇지 않게 어둠을 고통을 죽음을 말한다. 그중 난 어떤 것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해서 지껄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리 말할 수 없다. 그렇게 함부로 꺼내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만큼 난 생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생의 어떤 것도. 그래서 난 그 어떤 것도 말하는 게 아니고, 그 어떤 것도 쓰는 게 아니며, 삶다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나를 살고 있는 것이다.
난 평생 모든 것에 진중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삶에 닥친 진짜 문제에는 한없이 경박하고 경솔하기만 하다. 한마디로, 정성이 없다. 정성이 없다는 건 그 어떤 것도 진실되게 좋아하거나 그리워하거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이겠지. 진정 소중한 것이라면 어떻게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아직 한참 멀었지. 아직도 난 한참 멀었지.
다시금 일깨워줘서 고맙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희망의 불꽃을 고이 간직했다가 끝끝내 내게 줘서 고맙다. 네가 받은 것을, 네 것을 내게 선물해줘서 고맙다. 네 정성을 선물해줘서 고맙다. 온갖 것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껴안는 것은 제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이니까. 그 불덩이를 홀로 이고 지며 품는 것이니까.
네가 날 죽이고 살리는구나. 희망. 네가 내 희망이구나. 그것밖에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