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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14. 2021

공짜는 없다

회사는 도저히 희망이 안 보인다. 재택근무만 1년 반이 넘었는데 요새 신규 프로젝트 때문에 일주일에 한두 번은 사무실에 간다. 사무실에 들어설 때마다 공기가 다르다. 숨이 턱턱 막힌다. 자리에 앉아서 집중하려 하면 근처에서는 업무 얘기로 바쁘다. 듣고 있기가 괴롭다. 결국엔 또 돈 얘기라서. 이어폰에 이어 플러그를 귓구멍에 꽂아도 보지만 내 귓구멍은 동남아 몬순 기후인 건지 금세 습해져서 간질간질하다. 그래서 못해먹겠다.


돈 얘기뿐인가. 각종 영어가 난무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 아니, 알긴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단어들. 관심조차 없는 말들. 그것들이 내 귓구멍을 타고 들어올 때마다 힘들게 겨우 끌어올린 내 코나투스는 점점 바닥을 향해 간다.


그럴 땐 난 있는 힘껏 도망친다. 내가 사랑하는 것으로 몸을 피한다. 사무실 옆에 세워둔 모터사이클에 걸터앉아 담배를 문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다. 1일1식중이라는 거짓말로 사람들을 따돌리고 혼자 밥을 먹는다. 어떻게든 코나투스를 끌어올려보려고 90년대 갱스터 힙합도 들어보고 다 때려 부수는 락도 들어보고 오후의 산책 컬렉션이라는 근사한 재즈도 들어본다. 소용없다. 사무실에 들어오면 그 모든 게 다시 시작이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을 때, 난 그 소속감이 좋았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 나가는 게 좋았다. 그 길에 동료들이 함께여서 든든했다. 무엇보다 매달 통장에 찍히는 돈이 좋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열심이었다. 자기 전 침대에 누워 회사 얘기로 아내와 한참을 얘기하다가 다음날이 되면 어제처럼, 작년처럼, 다시 달려 나가곤 했다. 그런데 난 대체 어딜 향해 달렸을까. 내가 욕망하지 않는 어딘가로, 내가 편하지 않은 어딘가로, 내가 사랑하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간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난 그곳에서 한 뼘도 나아간 게 아니었던 게 아닐까. 하루 종일 뭔가를 바쁘게 하긴 했지만, 그건 사실 뭔가를 한 게 아니었다. 내 삶을 망각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을 망각하는 것, 내가 향해야 할 곳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 삶 위에 일과 회사를 두었다. 왜? 그게 마음 편한 길이니까. 내 삶은 어디로 갈지 모르겠지만, 일은 어디로 갈지 조금은 가늠할 수 있으니까, 그게 더 쉬운 길이니까. 그래서 한동안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사랑받으려 했다. 어쭙잖게도. 지금은 안 그럴까? 지금도 그렇다. 1년 전보다, 2년 전보다 조금 덜할 뿐이지. 지금도 관심받고 싶은 마음이 여전하다. 뭘로 관심받고 싶은가? 회사에선 단 하나뿐이다. 내가 맡고 있는 프로젝트의 성공. 잘난 당신들이 해내기 힘든 걸 내가, 바로 내가 해내는 것. 회사에서 사랑받는 길은 그것뿐이다. 뭐, 그걸 사랑이라 말할 수도 없지만. 내가 하는 프로젝트, 내가 속한 팀이 하고 있는 것, 해야 할 것 말곤 회사에서 관심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거다. 기계처럼 주어진 일을 처리하고, 해결사처럼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고, 도박사처럼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으로 '짠!' 성공을 만들어내는 것. 회사는 그런 곳이다. 회사에는 관심, 사랑을 위한 자리는 없다. 그래서 그곳에 갈 때마다 난 매 순간 위축되고 공허하고 슬픈 것이다.


그래서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될 때마다, 주말이 될 때마다, 난 기쁨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악착같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파괴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위축되다 못해 나란 존재는 흔적도 없이 먼지처럼 사라질 것만 같기 때문에. 그래서 매일 저녁 무언가를 한다. 내가 더 기쁘기 위해, 하루 종일 떨어졌던 코나투스를 다시 끌어올리기 위해.


내가 더 완전해지기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건 마냥 쉬운 게 아니다. 저항이 있다. 귀찮다. 피곤해. 눕고 싶다. 무용하다. 그거 해서 뭐하나. 뭐 그런 신체와 감정의 저항이 분명 있다. 그럼에도 그걸 뚫고 가야 한다. 두려움을 안고 모터사이클에 올라타야 한다. 차로 가득 찬 강남대로를 뚫고 50분을 달려 드럼을 치러 가야 한다. 재즈를 들으러 한 시간을 달려 홍대에 가야 한다. 좋아하는 카페에서 철학책을 읽어야 한다. 복근이 뜨겁고 얼굴엔 땀범벅이지만 운동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러 가야 한다. 집에 와선 호두에게 공을 백번 넘게 던져야 한다. 음악을 들어야 한다. 음악 속에 파묻혀 알코올의 힘을 빌려, 이렇게 자판을 두드려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래야 내가 다시 숨 쉴 수 있다. 그렇게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기쁨을 좇는 것. 슬픔으로부터 도피하는 것. 그건 어렵다. 내게 기쁨이 뭔지, 슬픔이 뭔지를 아는 것도 어렵다. 어려운 것 투성이다. 잘 살려면 어쩔 수 없다. 잘 살려면 맹목적이어야 한다. 맹목적으로 기쁨을 좇고 맹목적으로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한다. 그런데 맹목적인 것 역시 어렵다. 다른 무언가가 계속 눈에 밟히니까. 남들이 맞고 내가 틀린 건 아닐까 하는 의심, 회의와 매번 싸워야 하니까. 그래서 어렵다. 매 순간 날 봐야 하니까, 매 순간 내 감정을 살펴야 하니까, 매 순간 깨어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어렵다. 기쁨을 좇는 건 어렵다. 공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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