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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11. 2021

위험한 그녀

그녀를 처음 본 건 어느 한적한 클럽이었다. 사람이 많지도 않았던 평일 저녁의 그때. 그녀는 클럽 한가운데 바에 걸터앉아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웃긴 건지 활짝 웃기도 하고 또 어떨 땐 진지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클럽 한쪽 구석에서 친구 셋과 춤추며 놀고 있던 나는 그녀를 계속 힐끔힐끔 쳐다봤다. 친구들이 웃긴 춤을 추면 빵 터져서 웃다가도 이내 내 시선은 그녀를 향했다. 바에 걸터앉아 뭔가 사연 있는 눈빛에, 또 뭔가 알듯 말듯한 그 미스테리한 느낌. 친구와 함께하고 있지만 뭔가 모를 달콤 쌉싸름한 고독의 느낌! 


술에 취했던 건지, 친구들 앞에서 용기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은 대담함이었던 건지, 그때의 마음을 난 아직도 알지 못한다. 어쨌든 난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절당할 수도, 그래서 친구들에게 놀림감이 될 걸 알면서도 용기 냈던 건 살면서 그날이 처음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녀는 너무 예뻤다. 그렇게 예뻤던 사람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녀와 대화는 너무 즐거웠다. 그래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실컷 놀던 친구들이 이제 집에 가야 되지 않겠냐고 지친 얼굴로 바에 있던 내게 돌아왔을 때, 3시간이 지났다는 걸 알았다. 난 누군가와 그렇게 오래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난 누군가의 눈을 얼굴을 입술을, 그렇게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없었다. 난 시간의 흐름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난 공간 속 다른 이들의 움직임을 알아채지 못한 적이 없었다. 나와 누군가 사이에는 늘 무언가가 있었다. 시간이 있었고 공간이 있었고 다른 이들이 있었다. 그것뿐인가. 나의 관념, 나라는 관념이 늘 있었다. 그런데 난 살면서 처음으로 무려 3시간이나 난 나를 잊었다. 무려 3시간이나, 나 아닌 누군가만 있었다. 내 세계에 나는 없고 그녀밖에 없었다. 그땐 그걸 몰랐다. 어리석었던 나는 그걸 몰랐다. 그게 사랑이란 걸 몰랐다. 그걸 몰랐던 병신 같은 나는 이제 집에 가자는 친구들의 보챔에, "얘기 즐거웠어요"라고 말한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클럽을 나왔다.


클럽을 나설 때 친구들이 내게 말했다. 번호는 땄냐고. 나는 쿨하게 말했다. 그런 거 뭐하러 따냐고. 그냥 잠깐 얘기만 한 거라고. 친구들이 모두 의아해했다. 아니 그럼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한 건 뭐냐고. 난 그냥 씩 웃었다. 그렇게 쿨병이 다시 도졌다. 그렇게 그녀는 오랜 시간 잊혔다.


난 왜 비겁하게 그렇게 뛰쳐나왔을까? 왜 난 병신같이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땐 그게 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와서 보니 병신도 그런 상병신이 없다. 아니 정말, 난 왜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을까? 분명 그렇게 오랫동안 얘기한 건 무언가 있는 게 확실한데, 왜 난 줄행랑쳤을까? 


그땐 몰랐지만 이젠 안다. 무려 1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녀는 너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너무 매력적이라서, 평일 저녁 클럽 바에서 음악을 들으며 칵테일을 마실 수 있는, 너무 치명적인 사람이라서. 나를 잊고 시간을 잊고 공간을 잊고 친구들을 잊을 수 있는 너무 매혹적인 사람이라서. 그리고 평일 저녁 클럽에 있는 그녀는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 때문에. 고매한 나는, 위대한 나는, 훌륭한 나는, 클럽 죽순이와 놀 수 없어서. 내 미래는 창창하고, 너의 미래는 고루하고. 내 현실은 위대한 잠재성을 품고 있고 네 현실은 볼품없는 시궁창이고. 너는 나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너는 내게 부족하니까. 나는 너보다 더 대단하니까. 난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니까. 넌 나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난 도망쳤다. 번호를 물어봤다면, 다시 만나자고 했다면, 아마 그녀는 그렇게 하자고 했을 것이다. 예쁜 미소와 함께. 그런데 난 비겁하게 번호도 묻지 않았다. 클럽 죽순이와의 연애? 그건 내 인생의 오점이었다. 내 인생은 너무 소중하니까, 나라는 사람은 너무 소중하니까, 클럽 죽순이와의 연애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뛰어내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녀가 내 첫사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를 조금은 더 닮아갔을지도 모른다. 기쁨과 행복 속에 내가 나를 잃고 그녀를 닮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가 조금은 다른 누군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게 있을까 그런 건 아마 없을 거야, 역시 인생은 혼자야라는 어리석은 회의주의는 좀 더 일찍 끝났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녀와의 사랑이 끝나고 나서도, 그다음 연애, 그다음 사랑에도, 집에 돌아가는 헛헛한 길마다 날 미소 짓게 하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난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라는 관념 때문에, 그 망할 관념 때문에, 난 이곳에 있는 사람을, 이곳에 날 보고 있는 사람을, 내 얘기에 귀 기울이며 미소 짓는 사람을 잃었다. 이곳에 없어서 이곳을 잃었고, 지금에 없어서 지금을 잃었고, 사람에게 뛰어내리지 못해서 사람을 잃었다. 날 지키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난 나를 지킨 게 아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부유하면서, 어쩌면 진짜 나를 잃었던 것이다. 지키지 말아야 할 걸 지키다가 잃지 말아야 할 걸 잃었다.


그때 난 죽었어야 했다. 타자에게 뛰어내려 날 죽였어야 했다. 그렇게 내 세계를 깨부숴야 했다. 내 나르시시즘이 조금이라도 옅었다면, 그녀가 나보다 더 소중했다면, 난 사랑을 조금은 더 일찍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이 아픈 후회가, 슬픔이 조금은 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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