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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Nov 10. 2021

타워팰리스에 사는 여친

설레는 첫 데이트를 마치고 난 그녀를 집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집이 어느 쪽이냐 물었더니 도곡동 쪽이라 답했다. 강남역에서 같이 버스를 타고 도곡역 군인공제회관 정류장에 내렸다. 그러다 방향을 틀어 거대한 빌딩 아래로 다가갔다. 세상에. 그녀는 타워팰리스에 살았다.


남근마냥 우뚝 서서 세상에 모든 것을 굽이 내려볼 수 있는 곳. 70층 가까이 되는 그곳보다 높은 곳은 저 멀리 청계산 정도인 곳. 사람도 차도 개미새끼처럼 작아 보이는 타워팰리스. 그곳에 그녀가 살고 있었다.


당황했다. 아직 사귀기도 전인 관계에 미래를 꿈꾸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에게 많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스물다섯 살 어린 나이에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그 많은 사업 중에 하필이면 내가 동경하는 근사함이란 이미지에 부합하는 출판사를 약관의 나이에 경영하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것뿐인가. 그녀가 명문 고등학교에 미국 명문 대학교를 나왔다는 사실도 놀라움을 더했다. 나도 같은 명예욕을 좇아 비슷한 삶을 살아왔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려운 것인 만큼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런 가치를 성취한 내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깊이 취해있을 때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회가 좋은 거라고 말하는 것들을 성취한다는 건 사회적 가치의 획득이자 그것이 곧 나의 가치라고 의심 없이 믿고 있었을 때다. 그런 내게 처음 데이트를 한 여자가, 그것도 곧 사귈 수 있을 것만 같은 여자가 타워팰리스에 산다고?


그 후 난 이미 일 년 가까이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에게 이별을 고한다. 레스토랑에서 그녀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미안했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애써 담담한 척했다. 내가 개새끼라 욕해도 할 말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착했던 그녀는 내게 욕도 하지 않고, 그저 서럽게 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이후 새로운 여친, 그러니까 타워팰리스 여친를 향한 관심과 호감은 열정과 사랑의 탈을 쓰기 시작한다. 내게 관심과 호감의 대상인 한 여성은 이제 놓치면 안 될, 어떻게든 가져야 하고 지켜야 할 대상이 되는 마법 같은 전환이 일어난다. 그건 순수히 그녀를 위한 마음이 아닌, 사실상 나를 위한, 돈과 명예라는 사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그녀를,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녀가 갖고 있는 것을 내 소유물로 전락시키고 그녀 어깨 위에 올라타, 내가 사회의 꼭대기에 서고 싶은 열망, 꼭대기 위에 서서 저 아래 개미새끼들을 군림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내가 사랑했던 건 그녀가 아니라 나 자신이었던 셈이다. 그녀가 명문대학을 나오지 않았어도, 그녀가 출판사를 하지 않았어도, 그녀가 타워팰리스에 살지 않았어도, 난 그녀를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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