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의 역사

by 정도비

남편 옷을 사러 SPA 브랜드 매장에 갔다. 내가 활약할 시간이다. 매장을 쭉 둘러보고 남편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몇 벌 쓱쓱 뽑아서 건네준다. 남편은 내가 알려준 대로 이 상의 밑에 이 하의, 저 상의 밑에 저 하의를 숙지한 다음 피팅룸에 들어가서 옷을 한 벌씩 입고 나온다. 나는 피팅룸 앞에 서 있다가 남편이 옷을 입고 나올 때마다 착장을 훑어보고 이 상의는 통과, 저 하의는 탈락 식의 선별 작업을 한다. 간혹 옷은 괜찮은데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것 같으면 남편은 피팅룸 안에 둔 채 냉큼 매장으로 다시 가서 새 사이즈를 가져온다. 남편 피팅룸 문을 살살 두드리며 여보하고 부르면 남편이 문을 빼꼼 열고 다람쥐가 도토리 전달받듯 새 옷을 문틈으로 쏙 받아 간다.


옆의 다른 팀들도 상황이 비슷해 보인다. 커플, 모녀, 친구들끼리 서로의 착장을 살펴보고 선별 작업을 하는데 열중한다. 심사숙고의 시간이 끝나고 오늘의 결과가 결정된다. 양손 가득 새 옷을 사 가는 날은 쇼핑 대성공, 하나도 건질 게 없는 날은 쇼핑 실패. 쇼핑이 성공한 날은 카드값으로 스쳐 갈 월급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아리긴 하지만 행복감과 뿌듯함이 마음 가득 번지고, 쇼핑이 실패한 날은 돈이 굳었다는 안도감만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허탈하고 마음이 허하다.


그러다 문득 근원적인 질문이 떠오른다. 남편 옷을 왜 내가 고르고, 사고, 뿌듯해하거나 허탈해하고 있는 것인가. 분명 우리 남편이 나 만나기 전에도 옷이란 걸 입고 다녔을 텐데 왜 지금은 내가 옷을 안 사주면 당장 벗고 다녀야 하는 사람처럼 나보고 옷을 사달라고 하는 것인가. 내가 본인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고 하면 왜 자기는 모른다고 하는 것인가. 그런 질문들이 스멀스멀 머릿속에 떠오르며 약간의 억울함이 피어나려 할 때 문제의 바람막이가 떠오른다. 몇 년 전 남편한테 직접 마음에 드는 옷을 골라보라고 했더니 너무 자기 스타일이라고 집어 들었던 바람막이다. 내가 기겁하며 진심으로 그 옷이 마음에 드냐고 했더니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편을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아 이제 남편 옷은 내가 골라야겠다.


다행히(?) 남편의 취향이 확고하지 않아 쇼핑의 주도권은 나에게 넘어왔고, 넘어온 정도가 아니라 남편은 이제 아예 본인은 옷을 찾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에게 새 옷을 제공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내가 내 쇼핑하기도 바쁜 판국에 왜 남편 쇼핑까지 하고 있느냐 했더니 결국 내 취향대로 남편을 입히겠다는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본격 쇼핑 전 사전작업 차원에서 남자 온라인 쇼핑몰 사이트들을 기웃거린다. 나만 이렇게 사서 고생인가 싶어 머리를 쥐어뜯다가, 피팅룸 앞에 서 있던 수많은 여성 동지들- 오빠 이건 아니야 벗어 등등을 외치고 있던-을 떠올리니 나만 이렇게 사는 건 아니지 싶어 왠지 마음이 흐뭇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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