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은 순간의 메모들

들어가며

by 정이든

휴대폰 메모장 한 켠에서 수년 전의 메모를 발견했다. 맥락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으려 적어둔 짧은 메모였다.


이런 류의 메모들은 정제되지 않아 거칠거나, 딴에는 전쟁영화의 웅장함처럼 순간의 진지함이 묻어있는 덕분에 다시 읽기 부끄러운 경우가 많다. 이 메모도 그랬다. 일부를 발췌하자면 이런 식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의 이름'

'서운함과 너털웃음이 뿌연 연기처럼 기화되도록'

'용산역에서도 삶은 계속 흘러가고'


용산역이 적혀 있는 것을 보니 용산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집에 가는 버스에서 쓴 글인 것 같았다. 그 순간이 어렴풋이 기억이 날듯 했으나 끝내 기억나지 않았다. 메모를 훑던 중, 마지막에 적혀 있는 한 줄을 발견했다. 나는 순간 마음이 찡해지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000 차장님 본인상이 있던 날‘


*


인사팀에 있다 보니, 신입사원 때부터 다른 부서의 선임분들과 대화할 일이 많았다. 인사 업무라는 게 대부분 말단 사원들끼리 얘기해 봐야 답이 없는 것들이라, 최소 파트장 이상들과 대화를 나눠야 일이 진척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000 차장님도 그렇게 사원시절 때부터 오며 가며, 전화로, 메신저로, 업무 얘기를 함께 했던 분이다. 다만 친하지는 않았다. 흔한 점심 한번 먹어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말미에는 투병으로 휴직을 가셔서 뵐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사옥 공간에 있던 사람이 돌아가셨다는 것이 그 시절 나에게 적잖은 충격이었나 보다. 술을 걸치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문장들을 썼던 것을 보면.


그날 누구와 술을 마셔 울컥했던 것인지, 몇 번 버스 어느 자리에 앉아서 술냄새를 풍기며 이 메모를 쓴 것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의 내가 남겨준 메모 덕분에 나는 다시 한번 삶의 유한함과, 그래서 더 열심히 하루를 살아내야 한다는 사명감,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시절의 방황감 같은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시 한번, 000 차장님의 명복을 빕니다.)


*


내 인생은 보통 그렇게 흘러 왔다. 탄탄대로는 아니었고 적당히 굴곡진 국도를 따라 오르내리는 드라이브와 같았다. 또한 게으른 나 자신에 대한 투쟁이었으며, 깨달음을 통해 결핍을 채워나가는 과정이었다.


깨달음의 순간은 매우 짧은 찰나에 지나간다. 이때 만사 제쳐두고 메모하지 않으면 생각은 휘발되고 만다. 그래서 나는 순간순간에 떠오르는 깨달음들을 기억하고 적어두려고 휴대폰 메모장을 주로 이용했다.


좌절의 순간마다 나를 끌어올려주고 작은 성공의 위치에서도 크게 교만하지 않게 해 준 것은 바로 잊지 않고 틈틈이 적어둔 이 메모장, 인생의 오답노트였다.


사춘기 시절 내 인생을 바꿔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위대한 책에서, 스티븐 코비는 아래와 같이 말했다.


-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고치지 않고 또 그것으로부터 교훈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큰 실수이다.


뻔해 보이는 그의 글 안에 인생의 정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삶은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 말은 하고 나서는 뭐든 깨닫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깨달은 무언가-그것이 크든 작든 어떤 성질의 것이든-를 쌓아 나가는 것이 삶의 여정일 것이다.


*


인생의 찬란한 순간들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내 서사를 구성한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에 부모님께 받은 게임기 선물이라든지, 첫사랑의 아련함 같은 것 말이다.


찬란한 여지는 없는 보통의 순간들도 별과 별 사이 은은하게 별빛이 오고 가는 우주의 공간처럼 내 삶을 채워 왔다. 지금도 내 메모장에는 매일 쓰는 투두 리스트, 읽은 책들의 기록, 자전거 자물쇠 비밀번호 같은 평범하게 나의 일상을 구성하는 글들이 더 많다.


에세이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나는, 그런 평범한 일상과 찬란한 순간을 넘나드는 글을 쓰고자 했다. 그리고 계절이 반복되듯 뻔한 날이라 할지라도, 고유한 온도와 습도, 하늘의 모습과 바람의 세기가 정해져 나름의 이름을 가진 날들에 내가 애정했던 것들을 글로 옮겨 담고 싶었다.


그런 내가 이번 산문집은 최선의 의무감에 이끌려, 조금 다른 마음가짐으로 쓰게 되었다. 세번째 정이든 산문집을 통해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인생의 태도, 우리가 견지해야 할 자세,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 실패해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 같은 것들을 써 볼 생각이다.


우리는 단 하나의 인생을 딱 한 번만 살아가는 존재들로서,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것은 금전적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짊어진 의무와는 전혀 다른 의무다.


각자의 인생에서 우리는 모두가 주인공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만나온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사람들은 어느 한 명 자신의 삶에 진심이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나 자신을 주인공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이타적인 사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먼 나라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도 지금 이 세상이 내가 살아가고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측은함을 가질 뿐,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사라진 민초들까지 매 순간을 모두 할애해가며 가여워할 사람은 없다.


우리 머릿속에는 나 자신을 주제로 한 드라마와 토론, 위인전과 흑역사 같은 것들이 거의 대부분의 순간에 펼쳐지고 있다.


나 또한 그러하다. 나는 그러한 자신에 대한 최선과 의무감의 일환으로 나를 위해 메모해 둔, 절실하고 인생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깨달음의 말들을 이참에 정리해 볼 생각이다. 나를 위한 이기적인 글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독자분들의 삶에서 바람직한 태도를 찾아가는 과정에 어떤 형태로든 참고가 될 것으로 믿는다.


*


모든 사람의 모든 인생은 모두 달라서 절대적이고 바뀌지 않는 원칙이란 없다. 그러나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경향성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니 그 경향성을 이해하여 삶의 태도를 발견해 나가는 데 도움을 얻는 맥락에서 내 메모들을 봐준다면 좋겠다.



- 표지 이미지 : Gemini로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