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

단순해야 비로소 기억할 수 있는 것들

by 정이든

세상의 모든 진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면 무엇일까. '이 또한 지나가리라' 같은 오래된 문장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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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복잡하게 사는 것 같다. 키오스크 멤버십 적립부터 은행 본인인증까지 뭐든 다 복잡하게 느껴진다. 나만 유독 그런 건가. 세상이 복잡해서 생각이 복잡한 것인지, 생각이 복잡해서 세상이 복잡한지 잘 모르겠다.


사람은 모든 순간 모든 자극들을 100% 인지할 수 없기 때문에, 효율적인 방식으로 쉽게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그래서 인지하는 자극들을 머릿속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저마다 갖고 있는데, 그것을 심리학 용어로 휴리스틱이라고 한단다.


나는 어떤 휴리스틱 모음을 갖고 있을까. 세상의 모든 자극이 100이라고 한다면, 내 휴리스틱은 10조차도 제대로 커버하지 못할 것이다. 보통의 삶을 평범하게 살아와 경험과 시야가 좁은 탓이겠다.


그러니 100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이미 어른이 된냥 생각하지 말아야지. 최소한 스스로에게만은 위선을 떨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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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단순할수록 이해하기 쉽다. 그래서 짧게 문장을 끊어 얘기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하지만 지난주에 갔던 정말 맛있는 타코 음식점에 대해 얘기하는 순간에는, 기어코 길게 주절주절 늘여서 얘기해 버렸다.


소고기 타코를 얘기하는 한 문장만 해도 아마 1분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칠리소스가 맛있었다.


단순함이 필요할 때는 잠시 생각을 멈추는 것이 최선이다. 생각 멈추기에 산책이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생각에 집중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못하도록 달리기를 한다거나 헬스장에서 쇠질을 하며 근육이 뇌를 압도하도록 해버리는 것이 괜찮았다.


그러면 생각의 부기가 쏙 빠져서 담백한 생각들만 남는다. 잠시 먼발치에서 복잡한 고민을 돌아보다가 불쑥, 단순한 한 마디로 표현할 힘이 생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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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고 잘 설계된 반전 영화를 좋아한 적이 있다. 지금도 재미는 있다만 지적사고에 대한 내 열정이 식은 것인지 편한 유튜브 쇼츠에 길들여진 탓인지 예전보다는 잘 찾아보지 않게 되었다.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는 인셉션이다. 마지막에 팽이가 돌아갈 때의 그 소름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유주얼 서스펙트와, 디 아더스, 파이트 클럽 등등. 아, 나비효과도 정말 좋아한다. 그때 당시에는 정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있지? 하면서 여러 번을 돌려 봤었다.


당시의 즐거움을 돌이켜 보면, 여러 복선들이 얽혀 있는 복잡함 자체에 매료되었다기보다는, 의문이 풀리며 직관적으로 전후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그 깨달음의 순간이 좋았던 것 같다. 결말의 즐거움을 위해 중간 내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본 반전영화도 많았으니까.


결말의 반전이 주는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짧고 강렬한 이해감,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바꿔주는 그 순간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좋았다.


그 때 그 영화들

(이제는 오락 영화도 즐겨 본다. 이제 유행은 지났지만 마블 어벤저스 시리즈나, 범죄도시 같이 카라멜 팝콘 맛의 단짠을 오롯이 느끼면서 편하게 볼 수 있는 시리즈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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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함이 무조건적인 생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클라이맥스가 좋은 노래라고 한들, 가수가 애절하게 부르는 절정의 한 소절만을 가지고 그 노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수의 창법, 분위기, 가사, 간주, 어쩌면 그 곡을 짓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버무려서 (어떤 형태로든)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노래를 대체할 수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쉽지 않겠지. 세상에는 2~3마디 단어로 설명하기에 어려운 노래가 더 많을 것이다. 노래뿐 아니라 나를 둘러싼 많은 것들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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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할 때, 단순하게 생각해 보는 것은 무조건 도움이 된다.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다면 거기서부터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 폰트가 10이니 11이니 따지면서 보고서를 눈 뚫어지게 보기보다는, 보고서를 가져가서 내가 상사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들에 더 집중하는 것이 유효했다는 뜻이다.


..라고 하지만 지난주 보고서에서 제각각인 폰트들 맞추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뭐, 모든 순간 왜? 만 생각할 수는 또 없는 거니까.


단순하게 생각하고, 또 단순하게 기억해야 더 오래 기억한다. 그래야 더 쉽게 떠오른다. 인생의 많은 명언들, 속담들, 문장들이 남아 있는 것들은 삶의 진리들을 단순하게 잘 요약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이동진 평론가의 문장들이 읽히고 회자되는 것도, 그의 말이 문장이 길고 복잡한 사유의 정점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하고 명료하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기억했기 때문일 것이다.


복잡하면 단순하게, 이해하기 쉽게 만드는 능력만 있다면 의외로 돈을 쉽게 벌지도 모른다. 마케팅에서 고객에게 소구점을 찾아낼 때도, 복잡한 100 page짜리 시장분석 보고서 보다 몇 마디 직관적인 말이 더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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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글을 쓰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작가를 하려 하는 건가? 단순하게 한 문장으로 설명해 보려 했더니 ‘그냥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냥'이라는 말 안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 그냥 유명한 작가가 된다거나 작가라는 직업을 갖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이 아예 0은 아니겠으나 암튼)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고 싶고, 글을 쓰는 것은 힘들지만 대부분 그냥 좋고, 기회가 되면 언젠가는 책을 그냥 한번 내보고 싶다는 의미의 '그냥'이다.


하지만 '그냥요'는 너무 성의 없어 보이니 조금 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해 본 결과로는, 글을 쓰겠다는 마음의 이면에는 '생각을 남기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


살아오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순간순간 깨달은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썼다. 그래서 내가 책을 낸다면, 군대로 따지면 제대로 된 육군사관학교 교본 같은 것은 아닐 것이고 그냥 어느 날 제대하는 병장이 던져주는 '야 이병에서 병장까지 적당히 버티려면 이거 한번 읽어봐 봐' 하는 제목없는 낡은 노트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 막 자대배치를 받은 이병에게는 더 필요한 책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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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짧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길게 일기 쓰지 말고. 어차피 그거 다시 잘 안 읽게 되더라. 앞으로는 세 줄 이내로 써봐야지. 아직 해도 안 떨어졌지만 오늘 일기를 이참에 써 보았다.


[2025년 9월 28일의 일기]

- 글, 읽고 쓰는 삶의 즐거움

- 끝끝내 이번 주에 책 한 권은 읽었음. '일류의 조건'이라는 책임

- 정이든 부캐활동 더 열심히 해야지. 언젠가 책 한 권을 출판할 순간을 떠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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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화의 방식도 필요에 따라 구분될 수 있을 것 같다. 이를테면 타인과 생각이나 정보, 지식 같은 것들을 교류할 때는 '무엇을?'을 생각해 보고, 내 생각을 단순화할 때는 '왜?'를 생각해 보는 거다.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일 때는 (내가 상대방에게 말할 때도 마찬가지로)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제가 사실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알람이 안 울리고, 몸도 좀 으슬으슬해서요... 아니 그렇게 아픈 건 아닌데, 오늘 11시 회의는 들어가야죠...'라고 말하는 후배의 말은 요약하자면 '지각인데 얼른 갈게요'다.


상대가 길게 얘기하면, 당최 무엇을 얘기하는가를 요약해서 생각해 봐야겠다.


반면에 내 생각을 스스로 정리하고 나 자신을 설득할 필요가 있을 때는 '왜?'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나 자신이 설득되지 않으면 나 자신의 말도 잘 안 들으니까.


그러고 보니 대체 왜 나는 왜 쉬어야 할 주말에 매주 글을 쓰고 있을까? 왜 매일 회사를 가서 일하고 있으며, 왜 러닝을 시작했고 아직도 1km를 6분대로 뛰면서 허덕이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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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다짐한다. 뭐든 단순하게 생각해야겠다. 그동안의 후회되는 말들과 초조했던 순간들까지도. 그냥 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 보면 그것으로 정말 별거 아닌 것이 될 것이다. 긴 인생과 복잡한 관계와 답이 없는 문제들도 다 모아 모아서, 압축파일의 짧은 이름 하나로 묶어 버려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미사여구 같은 부차적인 순간에 휘말리지 말아야지.


앞으로도’ 좋은 인생이었다.'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면 좋을 시간들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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