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한가운데에 있을 때는 그저 보통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과 비슷하면 눈치를 보면서 사는 이 서러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냥 평범하게 결혼하고, 보통의 사랑을 하고, 때가 되면 아이를 낳고, 그런 보통은 삶이 필요했다. 남편이랑 투닥거리면서 싸우다가도 얼굴을 보면 짠하고 귀엽다는 회사 선배님들의 삶은 그야말로 이상적으로 보였다.
우울증이 어느 정도 개선되고 상담 선생님과 심리 검사를 다시 해보았다. 대부분 무난한 결과가 나왔지만 몇 가지 표준 범위를 벗어나서 나오는 지수들이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모든 결과가 보통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여쭤보았다. 선생님께선 말씀하셨다.
"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들이 다 다르더라고요. 정은님도 당연히 달라요. 원래 성격이 외향적인 사람이 보통 사람처럼 되었다면 그 사람은 정상인 걸까요?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다면 타인의 기준을 의식할 필요는 없어요. 정은 씨는 워낙 외향적인 사람인데, 회사 생활 말고는 사람을 안 만나는 거 보면 위축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죠. 저는 늘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니까 회사만 생활만 하는 것도 즐거울 수 있죠."
선생님은 나의 행동이나 기분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상대적인 평균을 맞춘다고 해서 우울증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는 보통의 사람이 되고 싶어서 외부의 기준을 주의 깊게 살피는 사람이었다. 상대적인 행복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항상 나와 비교할 대상이 필요하다. 나는 주로 두 대상과 비교를 많이 한다. 하나는 과거의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타인이다.
나는 과거의 나를 지금의 나와 비교한다. 나의 행동조차 시간축으로 평균을 내고 지금의 나와 비교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정확한 평균도 아니다. 나의 뇌가 상당히 편향되어 있어서 '잘난 나'만 나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대의 고운 피부는 내 피부였다고 생각하지만, 20대의 화장 못하는 곰손은 내 손이 아닌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묘하게 높은 평균을 나에게 강요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과거) 평균의 나'를 이기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나를 계속 비교대상으로 놓게 된다면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라떼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피부가 좋았었는데라고 슬퍼하거나, 라떼는 피부가 좋아서 로션도 안 발라도 말이야라고 하거나.
타인과의 비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타인의 경우에는 평균을 낸다기보다 뛰어난 한두 가지의 특징을 많이 비교한다. 그래서인지 눈에 띄는 모든 것이 비교의 대상이 된다. 아이가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생물학적인 뒤처짐을 한탄하기도 했고, 기발한 특허를 쓰는 다른 사람의 능력을 질투하기도 했다. 참으로 쓸데없는 감정 낭비인 것인데, 그만두는 것도 상당히 어렵다.
처음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고 예전의 기억을 더듬다 보니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신기하게도 아무런 느낌이 없었던 때였다. 몇 달을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음식 맛도 잘 느끼지 못했으며, 다 갈라진 피부에서 피가 나와도 아프지 않았다. 최근에 글을 쓰기 위해 그때를 다시 떠올렸다. 순간순간을 생각나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한다. 분명 괴로웠을 텐데 그 당시에는 신기할 정도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무사히 뚫고 나온 것이 참으로 다행이고, 주변에 천사들이 많아서 참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면 행복에는 '감각'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나의 감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나만 느낄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다. 내가 오늘 먹은 치킨이 너무 맛있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인 것이다. 작년에 유명 수제 맥주집에서 먹은 그 비싼 치킨보다 분명 맛있지 않다거나, 어제 친구가 먹고 인스타에 올린 그 치킨이 더 맛있을 것 같다는 이유로 눈 앞의 치킨에 집중하지 않다면 손해인 것이다. 지금 혓속에 퍼지는 치킨 양념의 짭조름한 맛과 잇몸 근육에도 전해지는 튀김옷의 바삭함이 좋으면 지금이 행복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기업을 다니지 않고, 결혼도 실패하고, 아이도 없지만, 지금 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있으며, 희로애락을 모두 느낄 수 있는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 (이 정도 깨닫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나를 이끌어 주고 졸업하도록 해 준 상담 선생님께서도 보람이 있으시겠지?)
상담 마지막 날 선생님께서 주신 졸업 꽃바구니. 장미를 주고 싶었는데, 코로나로 너무 많이 남아버린 카네이션도 같이 담으셨다고 한다. 참 따뜻한 꽃바구니다.
립스틱
- 이영배
양지바른 장독대 곁에
동글동글 립스틱으로 빨간 입술 그리고
팔월 한여름
새벽부터 뜨거운 여인
얼굴은 붉고 웃음꽃 활짝
통통한 피부 깔끔한 몸매
키 작아 가련한데
막내의 천진난만
아는 둥 모르는 둥
오직 당신만 사랑하는 당찬 채송화
낮은 뜨락에 살면서도
눈빛은 초롱초롱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좋아서 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