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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Sep 08. 2020

내가 좋아하는 순간들

내 삶의 소확행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 단어의 어원을 본 적이 없다. 어렴풋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집에서 나오는 말이라는 이야기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최근에 그 말이 궁금해 어원을 찾아보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랑겔한스 섬의 오후'라는 에세이에 나오는 문구라고 했다. 그 에세이를 읽고 싶어 인터넷 서점 여기저기를 기웃거려보았지만 모두 절판이었다. 이 에세이가 수록된 책은 86년도에 출간되었다고 하니 워낙 오래되어 절판인 것일까. 우리나라에서 소확행이 유한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35년 정도 된 단어라는 것은 참으로 의외였다.


10년 전쯤 갑자기 취업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소확행이라는 단어를 듣지 못했고, 들었다 하더라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으레 모든 취준생이 그렇듯이 어른들의 말을 되새기면서 취업 준비를 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해야 하고, 지금 열심히 해야지 나중에도 행복해진다는 말이 청년들의 생활 속 좌우명이 된 것이다. 그렇게 '남보기 부끄럽지 않게' 취업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내가 행복했을까?


여느 감정과 비슷하게 '행복감'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깨달았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맛을 안다고, 행복도 자주 느끼는 사람이 잘 느끼기 마련인 것이다. 최근에는 어린 학생들도 소확행을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어릴 때부터 연습하는 것이다. 행위에 '행복'이라는 태그를 달면 그 의미를 좀 더 쉽게 느낄 수 있다. 참으로 신기하게도 아주 작은 행동도 이름을 붙여주고 '행복'이라는 태그를 달아주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어떤 행동에 행복을 느끼는지 나의 소확행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1. 자기 전 침대에 누워 남자 친구에게 하루 일과를 읊을 때

전화는 주로 스피커 폰: 쓸데없는 말들만 하는데도 계속할 말이 있어 신기합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맥락을 읽고 그 흐름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대화를 할 때 너무 긴장하고 얼어 있어서 내가 먼저 아무 이야기나 꺼내기 부담스러워진 것이다. 그런데 남자 친구와 통화할 때는 생각 없이 아무 이야기나 해도 된다. 회사에서 필요한 이야기를 한껏 하고 퇴근해서도 또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는 주로 하루 일과를 읊는데, 정말 쓸데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이야기하곤 한다. 봉골레 파스타가 먹고 싶어 바지락을 2500원 치 샀는데 생각보다 튼실해서 너무 좋았다든지, 오늘 요구르트 여사님께 슈퍼 100을 사 먹었는데 오랜만이어서 맛있었다든지 하는 말들이다. 가끔 감정이 격해져 있는 날이면 신세한탄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통화를 하다 보면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서 좋다.





2. 출근길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글감을 찾을 때

그림에서라도 마스크를 벋고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참으로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서울은 버스의 배차 간격이 경기도보다 짧지만 아침 시간에 차가 막히면 길게는 15분도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그럴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글감을 찾아본다. 글을 올리겠다는 부담감 없이 브런치 작가의 서랍에 제목들을 나열해보기도 하고, 휴대폰 노트 앱을 켜서 그림을 그려보기도 한다. 그러면 정말 버스가 순식간에 나를 데려가려고 온다. 버스를 타고 밖을 내다보면서 버스 정류장에서 생각했던 글감의 에피소드를 생각하기도 하고 잠이 들기도 한다. 






3.  킥복싱 마치고 시원한 물 마실 때

처음에는 체육관 정수기에 설탕물이 나오는 줄 알았지 뭐예요.


학교 다닐 때 100m를 18초대에 뛰었던 나는 운동을 너무 싫어했다. 그러다가 이러단 죽겠다 싶어서 2년 전부터 이런저런 운동을 조금씩 시작했다. 처음에는 운동을 너무 못하니 PT를 받았다. 그 이후에는 줌바를 조금 하다가, 작년 12월부터는 킥복싱 도장에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등록했을 때는 준비운동조차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계속 도장을 간 이유는 체육관에서 마시는 물이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평소에 물을 많이 마시지 않는 사람인데 체육관만 가면 제습기처럼 물을 빨아들인다. 1시간 운동 동안 1리터는 거뜬히 마시는 것 같다. 하루는 정수기에서 물을 뜨는데 같이 수업을 듣는 어느 분이 나에게 "여기 물이 왜 이렇게 맛있어요? 저만 이렇게 맛있어요?"라고 물어보았다. 나는 갑자기 너무 웃겨서 정말 크게 웃어버렸다. 나 말고도 물 마시러 오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렇게 적고 보니, 주변에 '행복'을 연습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음에 감사하게 된다. 요즘은 코로나로 못 누리는 것들이 많지만 이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들을 찾아서 느끼는 연습을 또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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