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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Sep 16. 2020

아! 너 여주 친구 캐릭터였잖아 (1)

여주 친구의 리즈 시절



가끔 살다보면 내가 주인공이 아닌것 같아서 힘이 빠지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 인생인데 왜 내가 주인공 같지 않느냐는 푸념도 한다. 하지만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그 존재만으로 반짝이는 경우가 참 많다. 최근에서야 유명해진 나와 동명이인의 배우님이 있다. 영화 속 여주는 아니지만 정말 주인공 같은 인생을 살고 계신 분이다. 배우 이정은님은 영화 <기생충>으로 유명해 졌지만, 그 전에도 많은 작품에서 빛나는 역할들을 소화했다. 정말 소중한 역할이다.

나의 삶이라고 항상 주인공으로 살기는 쉽지 않다.
나의 20대도 그랬다.
항상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그 나름대로 풋풋하고 반짝이는 젊음이었다. 


영화 < 기생충> 중











"아! 니 좀 여주 친구 캐릭터였잖아."




가끔 동아리 친구들이 추억 이야기를 하다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예전에 난 여자 주인공 친구 같은 캐릭터냐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극 중에 빠질 수 없는 캐릭터지만 비중이 애매하다. 효리 언니 노래를 빌리자면 영화에는 청순가련한 여자 주인공이 있고, 그 옆에 더 끌리는 나쁜 여자가 있다. 그런데 나는 노래에는 나오지 않는 주인공의 옆에 있는 착하고 수수하고 큰일이 발생하지 않는 청정지역 여자 주인공 친구였다. (좋은 말로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대학시절 나는 통기타 동아리 소속이었다. 나는 음악에 관심도 없지만 같은 과 친구 손에 이끌려 동아리를 가입했다. 아직까지 기타를 못 치지만 그 덕에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  


우리 동기 중에는 동기 남자아이들과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은 여자 아이가 있었는데, 대만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 나온 주인공과 닮은 느낌에 말투가 도도한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의 도도함을 배우고 싶어 자주 따라다녔다.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中


하루는 친구와 학교 앞 놀이터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는 스무 살의 여름이었고, 아마도 방학에 동아리에서 하는 악기 강습을 듣고 있던 때였을 것이다. 그 여름은 여느 대프리카의 여름답게 아주 뜨거웠는데 그래도 웬일인지 그늘은 시원했다. 지금은 동사무소 앞 작은 놀이터에도 우레탄이 깔려있었지만 그때는 놀이터 바닥이 모래로 되어있었다. 뜨거운 열기에 모래가 바싹 익으면 그 위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을 감싸듯이 마른 모래 먼지가 일었다.


저 멀리서 아주 작은 모래먼지가 보이더니 갑자기 어떤 남학생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러더니 친구에게 정말 부끄러워하면서 말을 걸었다.


'저... 연락처 좀...'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설렘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반짝이며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도도한 여자 주인공이던 내 친구는 눈빛에 일말의 변화도 없이 그 남학생을 보고는 또박또박 이렇게 말했다.


"저기 있는 친구들이랑 내기하셨어요?"

친구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50미터쯤 멀리에는 똑같이 쭈뼛거리는 남학생 두 명이 서 있었다. 그 남학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제가 맘에 들어서... 친구들 보고 기다리라고...."

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친구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있던 남학생 두 명은 키득거리는 기색도 없이 서 있었고, 내 친구가 쳐다보자 이 상황을 애써 회피하기 위해 눈을 돌리고 어쩔 줄 몰라했다.


큰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있던  친구는 "그럼 수고하세요."라고 말하면서 벌떡 일어나서 걸어가버렸다. 나도 친구가 걸어가자 따라 일어나 걸어갔다. 몇 초가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동안 친구에 대한 부러움과 생판 처음 보는 그 남자 사람에 대한 불쌍함이 느껴졌다. 나는 친구에게 왜 그렇게 쌀쌀맞게 대했냐고 물어보았다. 친구는 전에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번은 친구와 내기로 연락처를 받아가서 기분이 상했다고 대답했다. 살면서 몇 번이나 이런 사건을 겪는 그녀가 내심 부러웠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스물다섯이 된 나에게도 드디어 그 친구에게 배운 도도한 스킬을 써먹을 때가 찾아왔다. 제주도 학회에서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자 사람이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이다. 내가 마지막 세션에서 발표를 마치고 학회장이었던 리조트 로비에서 공항으로 가는 셔틀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6월 말의 제주도는 없던 사랑도 샘 솓을 만큼 맑고 반짝이는 하늘을 드러내고 있었다.


로비는 천장이 높고 큼지막한 소파 여러 개가 놓여있었는데, 나는 그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키 크고 마른 남학생이 대뜸 내 앞으로 와서 휴대폰을 내밀었다.

".... 예?"

당황한 나는 이 상황을 이해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그 남자 사람에게 의문문을 던졌다. 그리고는 바로 상황이 이해가 갔다. '마지막 세션 발표가 마음에 들었나 본데? 학회의 첫 논문 발표였는데, 상당히 괜찮았나 봐. 역시 나 열심히 쓰길 잘했어.'라고 생각하며 기뻐했다.

그리고 그분에게 "연구실 전화번호가 기억이 안 나는데, 우선 제 전화번호 드려도 되나요?"라고 말했다.  당장이라도 커리어 우먼이 된 것 같아서 정말 기분이 좋았다.


한 2초 정도의 정적이 흐른 뒤, 그분은 "네"라고 대답하고는 나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애니콜 피처폰 버튼을 또각또각 누르는 감촉이 좋았다. 내 번호를 찍어서 주고 나니 그 남자 사람은 갑자기 얼굴이 빨개졌다.

"제가 곧 비행기 시간이 되어서 가봐야 하는데요, 공항 도착하면 꼭 바로 연락드릴게요."라고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로비로 뛰어갔다. 야자수가 심겨 있는 로비는 빛으로 가득했고, 그때서야 나는 정신이 들었다. 이것은 그때 그 친구가 여러 번 겪었던 '번호가 따인다.'라는 상황이었단 것을.


나는 왜 그때 연구실 전화번호를 들먹였던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해야 했다. 역시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분은 공대생답지 않게 체크무늬 난방을 입지 않고, 깔끔하게 검은색 난방을 입고 있었고, 다시 생각해보니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얗고 착하게 생겼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고민해 봤자 헛소리를 하면서 번호를 찍어줬기 때문에 연락이 안 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메일도 가르쳐 주겠다고 이상한 오지랖을 부리지 않은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혼란 속에서 공항으로 가는 셔틀을 탔다. 셔틀을 타니 왜인지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 구나라고.


해안도로를 달리는 중에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단문 메시지가 아니라 MMS로 상당히 긴 문자였다. 본인은 서울에 있는 모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있는 28살 아무개이고, 내가 마음에 들어서 고민을 하다가 연구실 사람이 차를 가지러 갈 때 잠시 번호를 물어봤다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 괜찮으면 연락하고 지내도 되냐는 것이다. 역시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경험으로 정말 구름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동시에 남자 친구 생각이 나버렸다.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지만 너무 고마웠다. 촌스러운 나는 답장을 참으로 정성을 다해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OO에서 석사과정 중인 25살 이정은이라고 합니다. 저에게 관심을 가져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에게 사실 이렇게 번호를 달라고 한 분이 처음이어서 연구실 전화번호 같은 이상한 소리를 했네요 ^^;; 제가 남자 친구가 있어서 연락하고 지낸다고 말씀을 드리진 못하겠습니다. 서울에 조심히 올라가시고 기회 되면 또 뵐게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MMS로 문자가 왔으니 MMS로 답변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했다. 그 남자분도 조심히 가라고 답변을 주셨다. 그리고 철없는 나는 남자 친구와 친구들에게 자랑을 했다. 남자 친구는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왜 주냐고 화를 냈고, 내 친구 허모씨는 나에게 거짓말하지 말라고 '네가 길가는 사람 붙잡고 그냥 번호 준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체 문자를 왜 저렇게 성심껏 썼는지 이해가 안 간다.


어쨌든 나는 여주가 될 수 있는 상황을 여주 친구 같은 시나리오로 마감하게 되었다. 머릿속에서 다 지나간 일을 가지고 그때 연락 좀 해볼 걸 그랬나 싶다가도 나도 그 친구처럼 쿨하게 행동했었어야 했나 하면서 온갖 상황을 다 시뮬레이션했다. 물론 집에 가서 이불 킥도 했다. 그분도 전화번호를 받은 사람이 저렇게 좋아하면서 말도 안 되는 장문의 문자를 보냈으니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다음에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면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계획을 세워뒀지만 그런 일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지금은 워낙 오래된 일이어서 그분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 속에 나오는 그분을 머릿속에서 백마 탄 왕자님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상상은 공짜니까.

그분께서 혹시라도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신 감사의 의미로 제주 감귤 스무디라도 한잔 사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10년 정도 전에 제주도 학회에서 저에게 연락처 물어봐 주신 왕자님!

이 글을 보신다면 '작가에게 제안하기'로 메일 하나 보내주세요!

제가 정말 감귤 스무디라도 한잔 사드리고 싶어서 그래요!"




MSG가 풀파워로 들어간 내 머릿속의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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