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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Sep 20. 2020

아! 너 여주 친구 캐릭터였잖아! (2)

내 표는 왜 안 사줘요 선배

조금 오래되긴 했지만, <몬스터 페어런트>라는 일드가 있다. 내가 일본어를 처음 배울 무렵 보던 드라마이니 10년도 더 이전의 드라마이다. 자녀에게 너무 극성맞은 엄마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도입부에 재미있는 장면이 나온다. 학예회에서 연극을 하면 자신의 자녀가 왜 주인공이 아니냐는 부모들의 요청 때문에 주인공만 10명인 연극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극이 빨간 망토라면 주인공 빨간 망토 역만 10명에 늑대 1명과 같은 느낌이다.
왜 늑대는 10명이 아니고, 왜 할머니는 10명이 아닐까? 빨간 망토가 꽃을 따던 그 숲 속에서 나무와 새는 대체 누가 연기하는 것일까?



일드 <몬스터 페어런트>의 한 장면.









지난 글에 이어서 내가 여주 친구 캐릭터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나는 대학생활 동안 통기타 동아리에 몸담았다. 비록 음악적인 재능이 없어서 아직도 기타를 못 치지만 중창은 꼭 참여하는 편이었다.


대부분 대학 동아리가 그렇듯이 우리 동아리도 3월 가두모집을 통해 신입생이 들어왔다. 우리 동아리는 신입생들과 함께 적응하기 위해 모든 재학생들과 조를 나눠 중창 연습을 하고 5월중창대회를 열었다. 1학년 2학년이 주축이 되는 무대로 보통 15명 내외로 3-4팀을 이루게 된다. 연습량이 생각보다 많아서 3학년 4학년은 조에 소속이 되어 있긴 하지만, 가끔씩 들러서 치킨이나 피자를 사주고 격려를 하는 정도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경연에 앞서 축하 무대 같은 느낌으로 선배들의 웰컴 노래를 함께 하기도 한다. 내가 3학년이 되던 해에는 나와 동아리에서 가장 친한 친구, 그리고 복학생 선배 3명이서 아카펠라를 하게 되었다. 피부가 하얗고 얼굴이 조막만 한 내 친구는 외모도 가수 박지윤 같은 느낌이었지만, 목소리도 가수 박지윤처럼 몽환적이고 독특했다.

함께 아카펠라를 하기로 한 복학생 선배 A, B, C는 우리보다 두 학번 높은 선배들이었는데, 목소리가 모두 개성 있었다. 짱짱한 고음이 매력적인 선배 A가 가장 높은음을 담당하고, 감미로운 중음을 가진 B 선배는 중간 음역대, 동아리에서 저음 최강자인 C선배가 저음부를 맡았다. 나는 베이스에 깔리는 고음 영역을 담당하고 친구는 멜로디를 담당했다.


아카펠라를 처음 도전해보기도 했고, 영문 노래였기 때문에 우리도 상당히 연습을 많이 했었다. 가능하면 수업이 늦게 마치지 않는 날을 골라서 연습을 해야 저녁시간 전에 많이 연습을 해둘 수 있었다. 3주 정도의 연습 기간 동안 우리는 그렇게 수업이 마치면 동아리방에 모여 연습을 했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무렵 자동차가 있는 학생이 거의 없었는데, A 선배는 차를 가지고 다녔다. 5명이서 연습을 마치고 집에 가는 날이면 항상 A선배는 B, C선배와 인사를 하고 후배들 데려다주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A 선배네 집은 학교에서 우리들이 사는 동네에서 반대 방향이었는데 참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이상했다. 누구든 후배들을 바래다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친구네 집을 갔다가 우리 집에 들렀다가 가는 것이 보통일 텐데 그 선배는 나에게 굳이 "정은아 니가 먼저 내리니까 뒤에 타라."라고 말했다. 처음 그 선배가 집에 태워다 준 날 나는 그 선배의 마음을 눈치챘다. 나는 들러리구나!



그 선배는 친구네 집에 돌아가서 친구를 데려다주고 우리 집 앞을 다시 지나서 집으로 갔다.

 


그때도 놀기 좋아하고 좀 늦게 집에 가고 싶은 날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번 더 선배의 권유에 응해줬다. 선배가 워낙 집에 빨리 가자고 해서 조금 짜증 나기도 했지만 말이다. 처음 몇 번은 친구가 말이 없어서 나라도 끼워서 가보겠다는 심산이었겠지만, 나중에는 내가 귀찮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서로서로 이용해야 윈윈 아니겠는가. 일단 확실히 우리 집부터 제일 먼저 가니까 집에 가는 것은 편했다. 마지막 주 정도에는 뒷자리에서 내가 대화에 끼지 못할 정도로 둘이 친해진 느낌이었다. 내 친구와 그 선배는 만화 취미가 비슷해서 말이 잘 통했다. 그래도 나는 빨리 내리니까 괜찮았다.


내 친구의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이 친구와 중학교 때 상당한 절친이었다. 친구네 집에 자주 놀러 가기도 했었는데 내가 중학교 때 이사를 가고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연락이 끊어졌었다. 그러다가 대학교 1학년이 되어 같은 동아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처음 보는 사람이 이 친구의 매력이 귀여운 외모라고 생각하더라도 나는 진짜 매력이 독특한 성격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귀여운 외모에 조용한 말투이지만 성격이 쪽 같고 용감하면서 스릴을 추구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시원시원한 장군 같은 성격이다. 그래서 그 선배도 친구와 친해지고 나서 매력에 빠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친구를 장군이라도 부르겠다.)


연습 기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중창대회가 끝나면 놀이동산에 뒤풀이를 하러 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A선배가 엄청 적극적으로 추진했는데, 나는 조금 애매했다. A선배가 서둘러서 집으로 가자는 바람에 B, C 선배와는 특별히 친하지 않은 상태인 데다가 나는 무서운 놀이기구를 잘 못 타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놀이동산 그 특유의 분위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결국엔 오케이를 했다.


중창대회 날이 되었고, 우리는 열심히 연습한 덕분인지 무사히 무대를 마쳤다.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생활 동안 함께한 무대 중에 가장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그날 저녁에는 동아리에서 신나게 술을 마시고는, 다음 주 토요일 8시 50분에 놀이동산 정문 매표소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놀이동산이 9시에 문을 열기 때문에 조금 일찍 표를 끊기 위해서였다.



놀이동산을 가는 날이 밝았다. 우리는 약속시간에 매표소 근처에서 만났다. 할인 카드는 잘 챙겨 왔는지 서로에게 물어보면서 신나게 매표소 앞으로 갔다. 본인 50% 할인카드를 각자 손에 쥐고는 차례를 기다렸다. B, C 선배가 먼저 표를 사고 A선배 차례가 되었다.


"어른 두 명이요."

....


"자, 장군아. 이거 니 표."

그 선배는 입가에 활짝 미소 꽃을 피우고는 내 친구에게 표를 건넸다. 친구랑 딱 붙어 서있던 나의 눈은 물음표로 바뀌었다.

"선배 내 표는 왜 안 사줘요?"

다른 선배들도 쳐다본다. 나는 다른 선배들을 등에 엎고 마음의 소리를 한마디 더 꺼냈다.


"아니, 선배 각자 표 게 할인카드 챙겨 오라면서요? 와... 치사하게 장군이 꺼만 사줘요?"

"그게 아니라, 지난주에 집에 갈 때 너 내리고 장군이랑 표사기 내기했거든."

"아, 일부러 나 내린 다음에 내기한 거예요? 그걸 여태껏 비밀로 하고 나보고 카드 잘 챙겨 오라고 하고?"

"뒷사람 기다린다. 얼른 끊고 들어가자. ㅎㅎ"

"와... 진짜. 나 같으면 티 안 나게 후배 들 거 다 사주겠다!"


나는 50% 할인이 되는 TTL 멤버십 카드를 들이밀고, 내 표를 계산했다. 그 선배를 조금 흘겨보았다. 짜증이 났지만 괜찮았다. 왜냐하면 오늘은 B선배, C선배도 포함해서 들러리만 3명이니까.






그렇게 A선배는 장군이와 연애하는 동안 '단둘이 놀이동산 가기 민망해서 친구들 불러놓고, 치사하게 좋아하는 여자애 표만 사는' 사람으로 나에게 많은 놀림을 받게 되었다. 둘은 잠깐 만나다가 헤어지고, 지금은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예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다. 신기하게도 여전히 나는 A선배와 사이가 좋다. 그리고 당연히 장군이 와도 사이가 좋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둘 다 다른 사람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 시절 내가 여주 친구 캐릭터로서 겪었던 노고에 대해서 아무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좋아하는 주인공을 보기 위해 주인공 친구들을 불러내는 분들은 꼭 주인공 친구들에게도 잘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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