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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Oct 25. 2020

그때 내가 그 돈을 받았으면 인생이 달라졌을까?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는 것


세 명이서 스핀오프 해서 창업을 한 지 5개월에 접어들었다. 많은 스타트업들이 그렇듯이 개발자만 3명이서 회사를 만든 덕분에 개발뿐만 아니라 운영, 기획, 마게팅, 디자인 등의 다양한 업무도 두루두루 나누어하게 된다. 다행히도 우리는 마음이 잘 맞았고, 지금은 프로토타입을 가다듬어 MVP를 만들고 초기 출시작을 준비 중이다.


출시를 하려고 보니 생각보다 손이 가는 일들이 참 많다. 홈페이지 제작이나 고객센터 운영, 홍보를 위한 영상 제작 등 회사에서는 경험하지 못한 다양한 일들 말이다. 막상 홈페이지 제작이나 홍보영상을 전문업체에 맡기려고 알아보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스타트업은 역시 손맛 아니겠는가! 그래서 우리도 그냥 직접 하자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홈페이지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학창 시절부터 그래픽 관련 과목들만 너무 좋아한 나머지 네트워크 관련 과목들은 하나도 듣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된다. 적어도 웹 기반 언어 한두 개는 알면 좋으련만. 처음에는 주말에 드림위버를 깔아서 직접 해볼까 호기롭게 도전해 보았지만 그 시간에 버그라도 하나 더 잡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어 깔끔하게 접었다. 대신 디자인 모드가 간편한 웹호스팅 업체를 찾아 가입을 했다. 일단은 이렇게 간단하게라도 직접 해보고 싶었다.


사실 내가 이렇게 직접 홈페이지를 만들겠다고 손을 든 이유가 있다. 10년 정도 전에 한번 홈페이지의 세계에서 도망을 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도망을 친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는데, 이번에 내가 해낸다면 그때의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일은 석사과정 때 미국에서 인턴을 할 때 일어났다. 나는 한국인이 많이 없는 시골의 대학 도시에 있는 연구실에서 인턴을 했다. 학문적으로 이름이 있는 대학이어서 한국에서 박사과정이나 포닥으로 오신 분들은 상당히 있었다. 관광지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처럼 6개월만 짧게 있다 가는 사람들은 없었고, 대부분 이 도시에서 길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도시와 인접한 몇 도시의 한국인 분들은 상당히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성당은 있지만 한인 미사가 없었기 때문에 몇번은 옆 동시의 성당으로 갔다. 그처 도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인 미사가 있는 곳이었다. 이때 같이 간 언니가 그 도시의 어떤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님을 소개해 주었다.


그 가게는 그 당시 상당히 인기 있는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토핑을 얹어 먹는 디저트를 팔았다. 일명 프로즌 요거트. (안드로이드 2.2 버전이 프로요였는데, Frozen Yogurt의 줄임말로 2000년대 초부터 유행하여 2010년 정도쯤에 아주 큰 인기를 끈 디저트였다.) 인근에 프로즌 요거트를 파는 가게가 몇군데 있었지만, 그 가게의 아이스크림이 제일 맛있었다.


다시 보니 또 먹고 싶다.


사장님은 아이스크림 맛을 직접 낸다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시고는 2호점을 낼 거라도 하셨다. 그러면서 나에게 홈페이지 리뉴얼을 하려고 한다고 알바를 해보면 어떻냐고 말씀을 하셨다. 당시 나는 홈페이지라고는 어릴 때 나모 웹에디터로 끄적여놓은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인상 좋으신 사장님은 무려 주당 10~15시간 정도 일해서 200달러 정도면 괜찮겠냐고 말씀하셨다.


나는 자신이 없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었는데, 같이 있던 언니들이 이건 정말 좋은 기회라면서 해봤으면 좋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내가 지금이라도 배워서 하려고 하는데 괜찮으신 거냐고 여쭤보았다. 사장님은 흔쾌히 좋다고 하셨고, 내가 배우는 것보다는 잘할 것 같다고 격려해 주셨다. 당시 한국의 최저 시급이 4천 원 정도였으니 나에게도 다음 학기 생활비를 미리 세이브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은 홈페이지 사진 교체, 영양 성분 표시 메뉴를 추가하고 페이지 만들기, 2호점의 정보를 표시하는 일이었다. 가장 중요한 일부터 나열을 하고 계획의 세워서 하나씩 차근차근해나갈 지혜와 경험은 나에게 없었다, 아쉽게도. 그래서 닥치는 대로 공부해서 꾸역꾸역 기능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2호점 위치를 구글 지도 API에서 가져와서 다시 포맷에 맞게 배열하는 일을 할 때는 문서를 읽고 며칠을 끙끙대다가 겨우 넣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 며칠 동안은 논문도 한 줄 못 읽고 연구실 주간보고자료에는 아무것이나 적어 넣었다.


그렇게 2주 정도가 지났는데, 나는 도무지 내가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의 퍼포먼스가 형편없기도 했고, 이렇게 버벅거리면서 계속 일을 해 나갈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사장님께 내가 도저히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리고, 첫 번째 작업만 마무리한 채로 포기 선언을 했다.  


옆 도시에 사는 사장님께는 문자로 나의 포기 소식을 알렸다. 사장님은 체크를 보낼 테니 몇 시간 일을 했는지 알려달라고 하셨다. 나는 한 일에 비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쏟았고, 내가 한 일이 너무 부끄러워서 차마 사실대로 이야기 하지 못했다. 그냥 돈은 안 주셔도 된다고 하고 슬그머니 피해버렸다. 사장님께서는 그 다음 주 주말 소개를 해준 언니를 통해 봉투에 200불을 적은 체크를 넣어 보내주셨다.

그렇게 나는 첫 홈페이지와의 싸움에서 포기를 해버렸다.


내가 만약에 그때 사장님께 솔직하게 일한 시간을 말씀드리고,

투자 시간에 비해 업무 결과물이 부끄러워서 그렇다는 말씀을 솔직하게 드렸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매주 그 돈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지금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어떤 일이든 직접 하려고 하면 작은 부분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막히게 된다. 노하우가 쌓이면 자연적으로 해소될 어려움이 시작 단계에서는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려움은 어느새 두려움이 되어서 발목을 잡는다. 나는 그때 '돈을 받을 만큼 익숙하지 않으니 혼자 좀 더 공부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공부하지 않음'이 당연히 되고, 해결하지 못한 작은 부분이 두려움이 되어 버렸다.


회사를 다니면서 '이건 절대 못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돈을 받으니 일단은 해야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임하다 보니 하게 된 것들이 상당히 있다. 돈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밥벌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돈은 내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시도할 수 있는 끈기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누군가 잘 못하지만 돈을 받고 일을 해도 될까라는 물음에는 무조건 하라고 이야기 한다.

 "지금은 잘 못하겠지만, 나중에도 못하는 상태로 있는 건 아니잖아."라고.


지금은 나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작은 일은 인생이 바뀌기에 충분하다. 이번에는 처음에 생기는 막막함을 어떻게 해서든지 이겨낼 생각이다. 그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팀이 있으니 적어도 하소연은 할 수 있다.


2주 동안 홈페이지를 만들면서 버벅거리는 날들이 참 많았다. 네임서버를 잘못 연결하는 바람에 메일이 안 오기도 했다. 홈페이지를 기획하느라 브런치에 글도 못 올렸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가다 보면 나중에는 내가 성정 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 멀었지만 힘내보자!



(P.S. 서버 꼬여 메일 안 오는 것도 론칭 전 재미있는 해프닝이라고 웃으면서 말한 우리 대표와 우리 이미지에 맞게 잘 만들었다고 좋아해 준 데이먼 님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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