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은 Feb 07. 2021

엄마가 어린이 세계명작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참 솔직한 사람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엄마는 공부 잘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학교를 가면 친구네 집 엄마들은 학교 다닐 때 다 공부 잘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우리 엄마는 학교를 성실하게 잘 다녔다고만 이야기했다.


엄마는 아빠 어디가 좋았냐고 물었을 때 "아빠가 중심이 잘 잡힌 사람이잖아. 똑똑하고."라고 말한다. 엄마는 공부 잘하는 남자가 그렇게 멋지다고 했다. ('물론, 살아보니 그게 다는 아니고...'라고 뒷 이야기가 많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의 결론은 항상 엄마가 그래도 공부 잘하는 남편 만나서 자식 넷 나아보니, 다들 본인보다 공부 잘해서 좋다고 끝난다. 집안에 '사'자 들어가는 형제가 있거나 특출 난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빠가 환갑이 넘어서 시인이 되신 다음에, 아빠의 시 여러 편이 실린 책이 나와도 엄마는 그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  책 중에서 아빠의 시만 읽으셨을 뿐이라고 한다. 엄마는 공부가 적성에 안 맞아서 책 읽는 것도 잘 안 맞다고 하셨다. 그런데 최근에 엄마가 책을 읽기 시작하셨다. 아빠가 집 앞 알라딘에서 큰 글씨로 적힌 어린이 세계명작을 엄마를 위해 며칠마다 한 권씩 사 주신다는 것이다.




한 달 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보자... 내가 지금 마지막에 '회장님의 돈봉투를 돌려드렸습니다'라는 글을 읽을 참인데, 거의 다 읽었지?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책을 끝까지 다 읽은 건 처음이네. 책을 읽어보니 세상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많더라.'

그저께 막 EBS와 브런치에서 만든 '너의 목소리를 그릴 수 있다면'을 아빠가 서점에서 사 오셨다고 한다. 엄마는 본인이 여태껏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이 책은 첨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고 하셨다. 남편의 시가 수록된 시집은 끝까지 안 읽으셨어도, 딸의 에세이가 수록된 책은 끝까지 다 읽으셨더니 엄청난 모정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본인이 책을 많이 읽지 않아서 부족한 엄마였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책을 읽으면서 그 안에서 삶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참 진솔하고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가 왜 부족한 엄마였냐고, 엄마 같은 엄마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면서 괜히 큰소리로 웃었다. 나는 아직도 엄마가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어색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엄마가 불안해 보이는 내 걱정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몇 주 후 엄마는 전화로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생용 어린이 세계명작을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용은 글씨가 크게 적혀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아빠가 집 앞에 알라딘 가서 자기 꺼 사면서 하나씩 사다 주는데, 내가 벌써 몇 권을 읽었다. 내랑 수준이 딱 맞고, 이야기가 참 재밌더라고. 책을 많이 읽어야 되겠더라."


엄마는 어릴 때 책을 많이 안 읽은 것이 부끄러워서 지금 어린이용 책을 읽는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이야기를 즐기는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엄마가 어릴 때는 외국에 나갈 일도 없어서 최근에서야 다른 나라를 여행해 보는데, 그 옛날에도 유럽에서는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고, 참 대단하다고 감탄하신다. 그런 멋있고 대단한 이야기를 읽으면 어릴 적 생각이 많이 나서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하셨다. 전화기 넘어 엄마의 말들은 독서토론회에서 듣는 멋진 말들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책을 보다 보니 옛날 사람들도 그렇게 미인에 목숨을 걸더라. 내가 그래서 아빠한테 '당신은 내한테 고마워하이소! 내 만나서 이래 명이 긴 거 아닙니까!'라고 해줬다 아니가."라고 하셨다. 세계 명작을 읽다가 아빠가 왜 호출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의 말이 너무 웃겨서 진심으로 큰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미인이 다들 그렇게 삶이 평탄치 않더라. 그래도 니는 너무 미인은 아니라서 다행이다."라고 갑자기 나까지 호출하셨다. 우리 엄마는 솔직해서 너무 웃긴다. 한바탕 웃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동생에게 전했더니, 동생은 '언니 갑자기 의문의 일패를 당했네'라면서 자지러진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엄마는 친구들과 몇 번 여행을 가셨다. 어릴 적 엄마는 부끄러움이 많기도 많았지만 외할아버지가 워낙 무서워서 여행을 많이 못 다니셨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남편도 아프지 않고, 자식들도 다 키웠으니 여행을 실컷 다닐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명작을 읽으면서 상상으로 온 세계를 여행하고 다니시는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부끄럼이 많고, 공부를 잘 못했다고 한다. 학교는 열심히 다녀서 공부를 하려고 책상에 앉았지만 잠이 자꾸 오더라는 것이다. (가끔은 오빠가 그런 엄마를 똑 닮았다고 디스를 하신다.) 그런데 자신은 좋은 친구가 많고,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다고 하신다. 다른 사람뿐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솔직하신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든 지금도 솔직하게 모험을 즐기신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것이 엄마를 똑 닮았다. 그리고, 이제는 엄마의 솔직함도 닮고 싶다.

"내가 겁이 많고 소심해서 실패할 때마다 풀이 많이 죽지만, 그래도 계속 도전하고 재미있게 살잖아."라고!

얼른 이번 명절에 엄마를 만나 어떤 책을 읽고 계신지 들어보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매일 용기가 필요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