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은 Apr 12. 2021

외동딸 코스프레

DAY 03. 여황제

오늘 밤은 내 남은 여행(인생)의 전야입니다. 설렘에 마음이 방방 뜰 수도, 걱정과 막막함에 두통을  겪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내일을 살아갈 나에게 여황제(선하고 지혜롭고 따뜻한, 이상적인 양육자)의 마음으로 축복의 말을 적어주세요. 불 끄기 직전 잠들락 말락 하는 아이의 머리맡에 누워 다정하게 속삭여주는 자장가도 좋아요. (중략) 떠올릴 때마다 힘이 되는 따뜻한 밥상 혹은 주양육자(엄마 등)의 손길, 가족과의  추억이 있다면 써주세요.
   - 나를 껴안는 글쓰기 중



"내가 봤을 때 누나는 어른이 되어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고 크게 자라날 사주야."

어릴 때는 내가 업어 키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동생이 요즘 갑자기 아재가 되었다. 이제 나이가 서른이 되었으니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 아재가 아니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내 눈에는 영락없는 아기다. 아재 같은 아기는 요즘 사주에 푹 빠져있다. (사주 외에도 주식이라던가 코인이라던가 이직이라던가 아재스러운 주제를 상당히 좋아한다.) 몇 년 전부터는 나는 사주를 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자꾸만 내 사주를 봐준다고 해서 요즘은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풀이를 듣고 있다.


사주를 보지 않게 된 계기는 사주카페 사장님의 아주 혹독한 사주풀이 때문이었다. 이혼을 앞둔 그 해에 심심풀이로 친구들과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매년 사주를 보는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그 해에는 유독 내 운을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주카페 사장님은 40대 후반 정도의 인상이 좋은 남자분이었는데, 고급스러운 표현보다는 직설적이고 재치 있는 표현을 많이 쓰시는 분이었다.


"성격 더럽다는 소리 많이 듣지요?"

"아... 아닌데요?"

"이래 바로 말대답하는 거 보니깐 성격 빡센거 같은데!"


나의 생년월일을 들은 사장님이 처음 한 말이었다. 호랑이띠 여자가 겨울 새벽에 태어난 것만으로 성격이 억세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지만, 멘탈이 약해진 상황에서 훅 들어오는 이야기는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난감했다. 사장님은 내 사주를 보고 한숨을 쉬시면서,

"결혼했어요? 안 했으면 좀 늦게 해야 좋은데... 이혼수가 있어."

라고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이혼을 준비 중이라고 말을 했는데, 사장님은 나의 올해 사주를 이렇게 한줄평으로 정리하셨다.

"그래도 올해 죽지는 않겠다!"

대체 내 사주는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이기에 이혼할 사주인 데다가, 죽을 고비 빼고 모든 고비를 다 겪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나는 복채 2만 원을 내고 욕만 한 바가지 얻어먹어고 사주카페를 나섰다. 함께 간 내 친구에게는 사주에 창고가 튼튼해서 기복 없이 살 것 같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 일 이후로 나는 사주라면 질색을 했다.


몇 년이 흐르고 남동생이 사주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내 사주를 봐준다고 했다. 나는 사주가 아주 안 좋아서 별로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남동생은 사주에 좋고 나쁨이 없고 다 다른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동생의 이야기에 따르면 나는 35세 기점으로 대운이 바뀌고, 그 전까지와는 다르게 일이 점점 잘 풀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나이가 들어서 부모님의 돌봄이 있고 실력을 키워 성공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사람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 잘 될 것이라고 말해주니 그 말이 참 맞는 말 같이 느껴졌다.






어릴 때는 부모님이 "손이 안 가는 맏딸"이라고 나를 자랑하셨다. 특별히 잘나진 않았어도 착하고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30년 넘게 "손이 안 가는 맏딸"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던 나는 이혼을 계기로 그 자랑스러운 타이틀을 포기했다. 7년 정도의 결혼 생활 동안 부모님이 걱정 한번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힘들게 살았다는 것을 모르셨다.


오빠가 미국에서 나를 데리고 들어온 그 날부터 나는 뜻밖의 외동딸이 되었다. 밥도 잘 못 먹고, 잠도 잘 자지 못했다. 다 큰 딸을 밤낮으로 챙겨야 하는 부모님의 마음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히 조금 잘 잔 날은 오빠 가게 일을 돕거나 언니와 조카와 놀기도 했다. 오빠의 카페를 처음 시작하는 동안 오빠는 나를 배려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해보라고 했다. 마음이 한껏 약해져 있던 나는 그것조차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가족들은 부담이 된다면 카페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지만 우선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 집에서 무엇을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표정이 없이 멍하게 지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부모님이 상당히 걱정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은 아빠가 경주 감포 바다에 바람을 쐬러 가자고 하셨다. 나는 특별히 어딘가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걱정하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따라가기로 했다. 아빠, 엄마와 셋이서 멀리 여행을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시고, 엄마는 운전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여행이 성사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빠 차를 타고 셋이서 고속도로를 올라갔을 때 느낌이 묘했다. 외동딸 코스프레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아직 여름의 열기가 남아있는 가을이었던 것 같다. 감포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주상절리 둘레길이 있다. 보통 제주도에서 보는 현무암 재질의 까만 해안가가 경주에 있고, 새파란 바다를 따라 소나무 길이 이어져 있다. 짭짤한 바다 냄새가 오랜만에 코에 들어왔다. 날씨가 맑아서 풍경이 정말 눈이 부신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몸에 힘이 없어서 짧은 둘레길을 걷는 동안 상당히 지쳐버렸다.


조금 더 걷고 싶어 하는 엄마에게 빨리 어디 카페에 들어가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자고 했다. 경주 인근에는 크고 고급스러운 카페들이 많았다. 풍경이 좋아 보이는 넓은 카페를 골라 들어갔다. 적당히 자리를 골라잡고, 음료 두 잔과 케이크를 시켰다. 엄마와 아빠는 카페인 체질이 아니라서 한잔을 나눠 드신다고 했다.


셋이서 카페를 온 것도 처음이었다. 자리에 앉아서 어색한 대화를 하다가 아빠는 나에게 걱정이 너무 많다는 잔소리를 하셨다. 늘 하시는 말씀은 이제 엄마 아빠가 건강하고 옆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느냐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앉아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사과를 하셨다.

"아빠가 그때는 너무 정신이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니 운이라는 게 있더라. 내가 그때는 너에게 참으로 미안했어."


나는 흔한 k-장녀였고, 아빠는 흔한 경상도 가장이었다. 그래서 급하게 결혼을 진행시킨 것에 대해서 부모님께 한 번도 불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빠는 자식들을 책임지고 분가시켜야 했고, 나는 아빠의 짐을 덜어들이는 것이 항상 당연했다.  살면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아빠의 사과에 얼떨떨하면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아빠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고, 그건 아빠가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버벅거렸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저녁날도 어김없이 엄마는 내가 잘 자는지 보러 오셨다. 이불을 덮어주시고, 덥거나 춥지는 않은지 물어보셨다. 어머니는 한동안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 정은이는 건강하게만 잘 살면 된다. 지금도 이렇게 잘 살고 있는데!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모진 소리 듣고 살았는데, 지금 이렇게 일상생활하는 것만 봐도 너는 정신이 아주 건강한 아이야! 내가 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아무 걱정을 안 했으니까 너도 걱정하지 마."


그 이후로 3년이 넘게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우울증과 공황에 늪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일을 하고 생활을 살아가면서 그 이전보다 훨씬 강해진 느낌을 받는다. 마음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나는 건강하고 강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말해 준다.

매거진의 이전글 쉼표를 선택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