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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Apr 24. 2021

오빠 친구 동생, 또는 동생 친구

DAY06. 연인

살아오면서 만난 좋은 인연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연인, 동료, 가족, 친구, 사제 관계 등에 관한 것일 수 있겠죠. 집, 마을, 학교, 직장, 동아리 등의 기회나 장소에 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고요. 그것이 내게 배움을 준 의미 있는 인연이었다면 어떤 것이든 좋아요.
특별해진다는 건 내가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계기가 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나에게 작고 큰 계기가 된 사람, 사건, 관계, 경험에 관한 이야기를 써주세요. 그 후로 나는 그 전과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나요?
  - <나를 껴안는 글쓰기>, 슝슝



대학교 무렵 나는 과외를 정말 열심히 했다. (TMI를 좀 하자면, 원래는 뚜레쥬르에서 빵을 열심히 팔았는데, 그걸로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시작한 과외가 의외로 적성에 맞아서 입사 전까지 과외만 열심히 하게 되었다.)

대학교 2학년이 시작된 아직 추운 이른 봄, 나는 동네에서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집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사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이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과외 수업이 끝나면 버스가 끊길 10시 30분 정도였다. 동네 골목은 가로등이 듬성듬성하여 약간 무서웠기 때문에 항상 어깨를 움츠리고 걸었다. 그때 길을 걷다가 아는 얼굴을 만났다. 지난달에 동아리에 새로 들어온 후배였다. 밤길이 무서워서 친한 척을 해보려고 했는데, 전화 중이어서 인사만 하고 지나갔다.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보조개가 진한 그 후배는 좀 특이했다. 모임을 좋아하는 듯 보였지만, 특별히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편이었다. 가끔은 저러다가 목에 쥐가 나지 않을까라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엄청 자주 환하게 웃는데 성격이 어두워보였다. 자주 가지고 다니는 까만색 노트에 무엇인가 열심히 적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다들 몰랐다. 동기들은 그 후배의 노트를 '데스노트'라고 불렀다.


별로 안 친한 그 후배는 느닷없이 인디밴드 공연을 보러 클럽에 같이 가자고 했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라는 그룹이란다. 그 후배가 나와 같은 동네에 산다는 것을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때 나는 '인디밴드'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았다. 클럽은 '나이트클럽'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얼떨결에 따라갔다. 가는 길에  말도 딱히 없었다.


다행히 정말 멋진 공연이었다. 문화적인 경험이 넓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조금 더 친해졌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후배의 형은 우리 오빠와 중학교 동창이었고, 그 후배는 내 동생과 초등학교 동창이었다. 학부모 회의에서 만난 어머니들끼리는 차를 마신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과는 달랐지만 공대생이었다. 대부분의 대학교가 그러하듯이 공과대학교는 학교 구석에 건물이 몰려있다.

집도 가깝고, 과 건물도 가깝고, 동아리도 같은 후배와 나는 자주 어울려 다녔다.


하굣길에는 후배의 연애상담을 많이 들어주었다. 후배가 게으름을 피우면서 학교를 안 가는 날에는 몇 번이고 전화를 해서 같이 학교를 가기도 했다. 동아리 방으로 가는 길에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가방 들어주기를 하기도 했고, 동아리 모임 시간이 남을 때에는 오락실에 가서 이니셜 D를 했다.


후배는 곧 군대를 갔고, 살다 보니 서로 바빠 몇 년에 한 번씩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었다.




ㅡㅡ


그로부터 12년 정도가 지나서 오빠 친구 동생이자 내 동생의 동창인 이 후배는 나의 남자 친구가 되었다.


힘든 일을 겪은 후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던 때 오랜만에 만난 후배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누나가  어떤 일을 겪어왔든 간에 그 모든 사건이 누나를 만들어 왔잖아.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가 좋다고 생각해. 오히려, 지금의 모습이 더 좋다고 봐. 아픔은 인간을 성숙하게 해 준다고 하잖아."

이 말은 진정한 위로가 되었다.


남자 친구가 되기 전 들은 말이지만 지금도 한 번씩 생각이 난다. 그동안 내가 살아온 엉망진창 같은 삶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작은 등대가 되어준다.


과거와 현재를 알고 있는 사람과 미래를 함께하기로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나를껴안는글쓰기 #나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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