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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Apr 28. 2021

6년 차 막내 직원은 프라푸치노를 시켜도 된다.

DAY 07. 전차

당신은 힘이 센 편인가요? 약한 편인가요? 신체조건이나 사회경제적 힘의 차이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편인가요? 상관없나요? 가해자였던 적이 있나요? 피해자였던 적은요? 사람 사이에는 힘에 관련된 일들로 별일이 다 일어나는 것 같아요. 그 '힘'에 관한 글을 써주세요.
  - <나를 껴안는 글쓰기 > 슝슝



처음 회사에 입사에서 배치받은 부서는 40명가량이 있었다. 배치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분기별로 한번 있는 워크숍과 회식 장소를 잡아야 했다. 총무를 맡고 있는 선배가 해외출장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당시 타 지역에서 회사 때문에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주변의 환경도 모를 뿐만 아니라 지도선배가 정해져 있지 않아서 부서의 분위기도 잘 몰랐다.


출장자를 제외하고 20명이 훌쩍 넘는 인원이 문화활동을 하고 식사하는 자리를 예약하는 것이 신입 사원에게는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워크숍은 사무실 벽에 A4용지로 투표판을 만들어 워크숍 날에 할 수 있는 활동에 스티커를 붙일 수 있게 해 두었다. 영화, 전시, 볼링 등을 적어두었던 것 같다. 워크숍 장소가 정해지면 부서에서 가장 인상 좋은 선배에게 회식 장소는 어디가 좋을지 물어보기로 했다.


처음 마음껏 워크숍 장소를 정하라고 했지만, 총무 선배는 멀리 해외에서 사내 메신저로 '튀고 싶어서 투표를 만들었냐.'라고 혼을 냈다. 사내 메신저로 랩을 하듯이 쉴 새 없이 뭐라 했다. 회식에서는 다른 선배들이 왜 이 가게로 정했냐고 화를 내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필 당일에는 비가 왔다. 우산을 챙겨갔던 나는 인상이 좋지 않은 부서장님에게 우산을 씌워드리고, 빠진 인원이 많아서 인원도 체크해야 해서 더욱 힘들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총무 선배는 항상 불만에 가득 찬 사람이었고, 회식에서 불만을 이야기하던 선배들은 중에 몇 명은 그냥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심각하게 힘들어야 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분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나는 잔뜩 욕을 먹고 기가 죽었다. 다시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6개월 뒤 나는 새로운 부서로 이동했다. 전공이 맞지 않아서 이동 전에는 걱정을 많이 했지만, 다행히도 부서에서 만난 사람들은 무척 좋았다. 우리 부서는 120명 정도였고, 10-20명 정도가 한 파트로 묶여 있었다. 새로 생긴 부서여서 30대가 대부분이었다.


나의 첫 파트장 C님은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회사에서는 1년에 한 번 총무를 청했지만, 우리 파트는 한 달에 한번 총무를 정했다. 총무는 회식의 메뉴 선정에 전권이 있었다. 총무가 된 사람은 자신이 퇴근하기 유리한 방향에 있는 가게를 정했다. 회사 캠퍼스가 넓어서 중앙 문과 정문 및 다른 문들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각 문마다 퇴근버스가 이동하는 방향이 달랐다. 대신 흔히 갈 수 없었던 음식이 맛있는 가게를 골랐다. 사람들은 매달 새로운 메뉴를 먹을 수 있어서 참석률이 높았다.  


업무에 있어서는 창의력은 신입이 더 좋다면서 아이디어를 마음껏 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이디어가 중요한 프로젝트에 메인 멤버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파트에서 막내라인을 맡고 있는 선배 중 한 명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책임은 책임이 지니깐, 사원, 선임은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도 돼요.' (책임은 과장, 선임은 대리 정도의 직책이었다. 지금은 직급이 개발 경력 단계로 변경되고, 모두 '~님'으로 부르고 있다.) 많은 아이이어 중 대부분이 쓸모가 있을 리가 없지만, 그런 분위기는 점점 좋은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나는 120명이나 있는 부서에서 무려 6년을 넘게 막내 생활을 했다. 선배들은 나에게 막내를 너무 오래 해서 힘들겠다고 했다. 어떤 선배는 '막내 6년 정도 했으면, 선배가 커피 사줄 때 프라푸치노 막 시켜도 돼요.'라고 말했다. 이 얼마나 스위트한 말인가. 그래서 나는 프라푸치노를 막 시키고, 회식 가서도 먹고 싶은 것을 눈치 보지 않고 시킬 수 있는 막내가 되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유연함을 가진 선배들 덕분이다.



나는 사회경제적인 힘에 대해서 그동안 크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도 잘 모른다.


하지만 회사에서 배운 것이 있다. 힘이라는 것은 항상 기준점이 있고, 그 기준점은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힘은 기준점과 방향이 있는 벡터라고 물리 시간에 배운다. 현실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힘의 크기도 중요하지만, 기준점과 방향도 매우 중요하다.

회식 메뉴는 총무라는 사람의 힘이 가장 세고 존중해 줘야 하고, 업무 결정권자가 정한 업무 방향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사람들은 경험력에서 나오는 지혜를 무시할 수 없으므로 그 의견들도 존중받아야 한다. 신입 사원의 아이디어를 창의력이 있다고 경청해 주던 선배들처럼 말이다.


힘의 기준점을 고정하는 사람들은 평면적인 힘 밖에 쓸 수 없다. 가끔 세상에서 돈, 학력, 지위, 나이에 모든 힘의 기준점을 맞춰놓은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 관계를 맺을 때 단 하나의 힘의 척도에 의해 고정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다. 나이에만 초점을 맞추는 사람들은 어떤 장소에서 사람을 만나더라도 나이 어린 사람을 무시하게 된다. 이렇게 고정된 관계 건강할 수 없다.


가끔은 힘의 역학관계가 너무나 분명해 보이는 세상에 갇혀버릴 때가 있다. 세상은 평등하지 않고 힘의 역학관계는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내 안에서 힘의 기준점이나 방향을 유연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편한 쪽으로 힘의 기준을 고정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나껴글 #나를 껴안는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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