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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은 Jun 05. 2021

돌아가신 고모를 생각하며

DAY 13. 죽음

나에게 일어난 큰 변화에 대해 써주세요.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요. 그 변화를 당신은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혹은 지금 나에게 다가오고 있는 큰 변화가 있나요? 그 변화 앞에서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이 경험한 죽음에 대해서 써주세요. 당신의 아주 가까이에 있는 누군가, 무언가의 죽임일 수도, 아슬아슬하게 당신을 스쳐갔던 죽음일 수도 있겠네요. 그 죽음이 살아 있는 당신에게 남긴 건 무엇인가요?
  
  - <나를 껴안는 글쓰기> 슝슝






얼마 전 남자 친구의 자상한 목소리를 듣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나 자기를 돌아가신 우리 고모한테 소개해드리고 싶은데... 고모가 자기 엄청 예쁘다고 좋아하셨을 텐데..."

행복하게 잘 놀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는 나를 보고 남자 친구는 얼마나 당황했을까.





어릴 때 나는 할아버지와 고모들의 손에서 자랐다. 그래서 보통의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이모에 대한 향수를 나는 고모들에게 느꼈다. 그것은 어쩌면 이모보다 엄마에 대한 향수와 비슷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린이집 운동회에서 나와 함께 달리기를 한 것도 고모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온통 논과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시골마을에서 주유소를 하셨고, 큰고모는 그 옆에 미용 의자가 2개 정도 있는 작은 미용실을 하셨다. 작은 고모와 고모부는 길 건너 산 중턱에서 정미소를 하셨다. 나의 주 양육자는 큰 고모였다. 큰고모는 시내에 있는 장터에 나갈 때 빨간색 립스틱을 발랐고, 집에 오는 길에 뻥튀기 가게에 들러서 내가 먹고 싶은 뻥튀기를 사주었다. 미용실에서 일을 할 때에는 현철의 노래를 주로 트셨다.




"정은아, 놀라지 마라. 큰고모가 돌아가셨다."

엄마에게 문자를 받은 그날 오후는 부서 월례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은 내가 회사를 휴직하기 전 마지막으로 출근하던 날이었다. 나는 좋아하던 선배들에게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갑자기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나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파트의 원님과 박님께서 차로 수원역까지 데려다주신다고 하셨다. 마지막 날이라 PC 반납을 제외하면 챙길 것은 없었다. 미리미리 짐들을 다 정리해 둔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님과 박 님은 가는 내내 자상하게 말을 걸어주셨는데 덕분에 울음을 멈추는데 큰 힘이 되었다.


수원역에서 기차를 탔다. 옆자리에는 고모 또래의 여자분이 타셨다. 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갑자기 가방에서 주섬주섬 삶은 고구마와 요구르트를 꺼내셨다.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그래도 먹으라고 한사코 손에 쥐어 주셨다.  


아주머니의 유행이 지난 빨간색의 립스틱과 투박한 손등이 꼭 우리 고모 같았다. 그때 고모의 얼굴이 처음 보는 아주머니의 얼굴에 겹쳐졌다. 하늘에서 우리 고모가 나 슬퍼하지 말라고 고구마를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차 안에서 삶은 고구마를 받아 들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베어 물었다. 아주머니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보면 나는 고모와 기차를 참 많이 탔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서 부모님 집으로 갈 때에는 항상 기차를 타야 했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방학 때마다 매번 고모와 기차를 타고 부모님 댁으로 갔다. 고모는 달걀이나 고구마를 삶아서 가져갔다. 그리고 고모는 칭얼대는 나를 달래주면서, "생수 있어요. 시원한 맥주 있어요."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기차 안에서 카트를 끌고 가는 아저씨를 기다렸다. 아저씨가 다가오면 귤이나 과자를 사주셨다. 어떤 날은 초코하임을 골랐고, 어떤 날은 에이스나 빠다코코넛을 골랐다.



울음을 참으면서 장례식장에 도착했더니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나는 펑펑 울었다. 아빠는 누이를 보내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으셨다. 나에게 왜 우냐고, 사람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섭리니깐 슬퍼말라고 하셨다.

고모가 오래 아프셨기 때문에 가시기 전까지 잘 돌봐드린 아빠와 엄마는 담담하셨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다음 달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기 때문에, "정은이가 외국 가서 걱정할까 봐 고모가 미리 인사하려고 하셨나 보다."라고 하셨다.


아빠는 누나에게 지극정성이셨다. 오랫동안 요양병원에 계신 큰고모에게 한주도 거르지 않고 찾아가 함께 산책을 했다. 어제는 엄마가 고모의 손톱과 발톱을 잘라드리고 목욕을 시켜 드렸는데, 가시기 전에 돌봐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하셨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대체 뭐가 바쁘다고 그동안 병원 한번 가보지 않은 것인지 후회가 되었다.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면서, 눈물만 뚝뚝 흘리면서 쳐다본 사진 속 고모의 얼굴은 너무나 낯설었다.


고모는 남편과 자식이 없다. 그래서 장례식도 단출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 가족과 작은 고모네 가족들이 3일 동안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다. 군대 간 작은 고모네 아들도 급히 휴가를 나왔다. 고모가 가장 오랫동안 예뻐했던 조카다.


염을 하러 갔을 때 고모의 얼굴은 무척 평화로웠다. 사랑을 할 때는 마음껏 해야 후회가 없다고 했던가. 가족들을 사랑하고 조카들을 자식처럼 사랑했던 고모의 얼굴에는 후회가 없어 보였다. 나는 왜 고모를 더 사랑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하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고모가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고모는 그렇게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드신 산기슭의 바람이 되었다.







고모가 떠나시고 나는 온전한 추모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곧 미국으로 떠났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모가 있던 시간을 온전히 받아줄 사람도 없었다. 나는 나 자신과 슬픔을 끝까지 억눌렀다. 고모에 대한 기억은 몇 달이 지나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시 떠올랐다.


18시간 정도 하늘을 날아 한국에 돌아오면서 고모가 생각났다. 어릴 때 명절 차례상을 정리하면서 문어다리 하나를 나에게 통째로 떼어주시면서 웃던 얼굴과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모습, 색종이로 학 접는 것을 가르쳐주던 기억, 같이 종이 인형을 자른던 기억들이 단편 단편 떠올랐다. 머리가 아팠고 더 이상 생각의 단편들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 전 갑자기 고모가 생각났다. 이제는 완치가 되었다고 생각했던 우울증과 공황이 나타나 병원을 다시 다닐 무렵이었다.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했고 잠깐 잠든 사이에도 많은 꿈을 꾸었다. 그러던 중 고모가 꿈에 나타나셨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자르시고는 화를 내고 떠나가셨다.


너무나 생생한 꿈이어서 검색을 해보니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은 자신의 과거를 잘라내는 뜻이라 했다. 그렇게 고모는 내 과거를 싹둑 잘라주셨고, 내가 못다 낸 화를 다시 내주셨다.

나는 다시 고모를 생각했고, 다시 추모를 하였다. 고모가 나에게 늘 이야기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살다 보면, 지는 게 이기는 거더라."

 "내가 국민학교밖에 안 나와서 공부에 미련이 많다. 너는 기회가 되면 꼭 배우고 싶은 건 다 배워봐."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면 그걸로 되는 거야."


...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지?

다시 공황과 우울이 생기면서 현실을 살지 못하는 내가 보였다. 잘 나가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결과만 보면서 질투하며 무기력해졌고, 배움에 열정을 잃은 내가 보였다. 가장 기본적인 잘 먹고 잘 자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고모를 생각하게 된 날 이후로 한두 달 동안은 잘 먹고 잘 자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매일 했다. 세상살이에 지고 이기는 것이 어디 있냐며 몸에 힘을 빼는 연습 해나갔다. 그리고, 배우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차츰 평정을 되찾게 되었다. 고모가 나를 키우면서 하던 그 말을 내가 나를 키우면서 쓰게 되었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 고모를 만나게 된다면 키워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를껴안는글쓰기 #나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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