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 넘버를 신청하며 겪은 일
2019년 9월, 영국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것저것 행정 처리할 것들이 많았다. 전기세, 수도세 등의 각종 요금들을 신청해야 하고, 또 일을 하기 위에 필요한 NI넘버 (National Insurance Number)라는 것을 반드시 신청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일을 해서 급여를 받으면 일정 금액 세금을 떼기 위해 이 번호를 발행하는데, 보통 발급에만 4~8주 정도가 걸리기 때문에 구직 중이거나 일을 시작했다면 반드시 이 넘버를 신청해 받아야 한다.
영어도 유창하지 않은 데다가 영국식 발음은 또 어찌 그리 어색한지, 도대체가 영어는 영어인데 무슨 말인지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특히 각종 계좌나 넘버 신청은 대부분 전화 상으로 이뤄지는데,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겠는데 전화로 이 모든 걸 설명하고 답해야 하니, 전화를 걸 때마다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시험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긴장하게 된다.
영국에 오자마자 구직 활동을 시작한 나는 운 좋게도 생각보다 빨리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10월 셋째 주에 우편으로 NI넘버 신청 서류를 보내 놓은 상태라 '별 문제없겠지' 생각하며 11월부터 출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우편을 보낸 지 2주가 다 되어가도 NI넘버 센터에서는 내 우편을 받지 못했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내가 10월 24일에 우편으로 신청 서류를 보냈는데 확인해 줄 수 있니?"
"아직 안 왔으니 더 기다려봐."
여러 번 전화를 걸어도 대답은 같았다.
"좀 더 기다려봐."
무엇이든 신청하면 바로바로 처리해 주는 한국과는 달리 영국은 거의 모든 일을 천천히 처리를 하기 때문에 한국보다 대략 5배 정도는 더 느리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튼 나는 '기다림'에 약한 한국인인지라 며칠이 지나 또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전화를 걸면 자동으로 나오는 여성의 듣기 싫은 쉰 목소리와 영국 악센트에 질려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자동응답 메시지가 나오더니 마침내 한 남자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았을 뿐인데도 전화기를 타고 그 남자의 짜증이 내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너 영어 왜 그래?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아침부터 정말 짜증 나네.'라고 말하는 그의 속마음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너 다음 주에 일자리 구한다고 인터뷰 봐야 돼."
"난 이미 일을 시작했는데 인터뷰를 보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인터뷰 봐야 돼. 인터뷰 보면 거기서 알아서 처리해줄 거야. okay? okay?"
"아니, 난 이미 신청 서류를 냈어. 내 레퍼런스 번호를 확인해줘."
"레퍼런스 번호 불러봐."
"03****"
"레퍼런스 번호가 이상해. 확인하고 다시 연락해."
그 직원은 확인하고 다시 전화하라는 말을 남기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억울하고 답답하고 불쾌했다. '내가 조금만 더 영어를 잘했더라면' 하는 속상함이 밀려왔다. 서류를 찾아보니 레퍼런스 번호는 103으로 시작했다. 내가 앞의 숫자 1을 빼먹고 말한 거였다. 이대로 포기할 수 없지. 나는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다른 목소리의 남자 직원이 전화를 받았다. 이 두 번째 남자 직원은 절차에 따라 다시 한번 나의 이름과 주소와 생일을 확인 후 레퍼런스 번호를 확인했다.
"음.. 아직 너의 우편이 여기로 오지 않았어. 언제 보냈니?"
"나 10월 24일에 보냈어."
"그럼 아직 2주가 안됐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고 2주 지나도 연락이 없으면 그때 다시 연락해."
"알겠어."
'휴. 또 기다려야 하는구나. 영국에선 모든 것이 기다림이구나.'
빨리 처리를 하고 싶은데 그게 내 마음대로 잘 안되니 너무 답답했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내가 우편을 보낸 날을 기준으로 11월 6일이 2주가 되는 날이었다. '이틀만 더 기다렸다가 6일이 되면 전화를 걸어야지'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회사에서 11월 5일에 연락이 와서 네가 NI넘버가 없어서 급여 계정을 생성할 수 없다고, 급여를 늦게 받는 것에 동의하냐는 메일이 왔다. 나는 또다시 NI넘버 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제발 좋은 사람이 받아라.'
듣기 싫은 쉰 목소리의 기계음이 나오는 동안 나는 간절히 기도했다.
"Hello~"
기분 좋은 인사로 대화를 시작한 건 상냥하고 친절한 목소리의 세 번째 남자 직원이었다. 여기는 남자 직원만 일하는 걸까. 아무튼 이 직원은 앞서 통화했던 두 명의 남자 직원들과는 180도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더듬더듬 서툴게 표현하는 영어도 끝까지 다 들어주고 결코 내 말을 중간에 자르지 않았다.
"너의 상황을 잘 알겠어. 잠시만 시간을 줄래? 내가 지금 확인해 볼 게."
"지금 여기 컴퓨터 시스템이 많이 느려. 조금만 기다려 줄래?"
"기다려줘서 고마워."
이 세 번째 남자 직원은 중간중간 계속 고맙다고 이야기하며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결국 이 직원은 아직 우편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내가 회사에 줄 수 있는 임시 코드를 부여해 줬다. 불안한 마음에 내가 한 번 더 이 코드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니 다시 천천히 불러주고 확인해 줬다. 마지막으로 내가 "우편이 보내는 도중에 사라지거나 잘 안 간 것 같기도 해. 한 번 더 나에게 신청 서류를 보내줄 수 있을까?"라고 물어보니 "얼마든지 보내줄 수 있어. 지금 바로 해 줄게."라고 친절하게 답변해 줬다. 정말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늘 도와줘서 너무 고마워."라고 이야기하자, "천만에, 좋은 하루 보내." 하며 인사해 줬다.
다행히 세 번째 남자 직원 덕분에 일이 잘 진행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조금 더 기다려봐야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조치를 취해주니 너무 고마웠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세 명의 남자 직원들.
첫 번째 직원은 나를 너무 짜증 나고 귀찮다는 듯이 대했고, 두 번째 직원은 나를 평범하고 적절한 선에서 대했고, 세 번째 직원은 정말 내 문제를 알고 정확히 도와주려는 마음으로 대했다.
오늘 세 번째 직원과 통화를 할 수 있었던 건 정말 행운이었다.
어떤 일을 하느냐는 사람에게 있어 참 중요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떤 회사를 다니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회사를 다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일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좌우한다.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대하느냐'
'나에게 주어진 문제나 사람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이에 대한 생각과 가치가 먼저 세워져야 무슨 일이든 올바르게 일 할 수 있는 것 같다.
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가 '나는 이 세상을 어제보다 오늘 더 깨끗하게 만드는 멋진 일을 하지'라고 생각할 수도, '이것도 저것도 안되고 결국 난 길바닥이나 쓸고 있는 청소부 신세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
'내게 주어진 일을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를 더 깊이 고민해 볼 문제다. 그게 무슨 일이든, 나는 꼭 세 번째 남자 직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