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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Nov 05. 2020

얼굴 누런 여자와 빈혈약 챙겨주는 남자

요 며칠 전부터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쪼그려 앉아서 방바닥을 닦다가 일어나면 띵-

바닥에 앉아서 아이랑 놀다가 일어나면 띵-


엊그제 남편과 나는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있었다.

남편이 내 얼굴을 보더니 심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여보 얼굴이 누래!!”

나 원래 누런데?”

“그게 아니라 더 누래! 이것 봐. 팔도 누렇네. 여보 얼굴이 너무 안 좋은데.??”


남편은 원래 누런 내 얼굴이 더 누레졌다며 호들갑을 떨더니 서둘러 약을 꺼내왔다.


안 되겠다. 빨리 빈혈약 먹자”


사실 이 빈혈약은 영국에 오기 직전에 한국에서 받은 건강검진에서 철분 수치가 낮다고 해 처방받아온 약인데, 먹으면 자꾸 변비가 오니 그게 싫어서 계속 안 먹어왔다.


이거는 무조건 한 알씩 먹어야 돼. 알겠지?”

알았어 알았어”


사실 요즘 몸이 좀 좋지 않다고 느끼긴 했지만 며칠 지나면 괜찮겠지 하고 그냥 넘기고 있었다. 약 먹을 생각은 안 했는데 남편이 하도 빨리 먹으라고 하니, 한 알을 받아 들고는 꿀꺽 삼켰다.



다음날 아침, 주방 싱크대 옆에 빈혈약 통이 덩그러니 올려져 있다. 잠에서 깬 남편이 또 약을 먹으라고 닦달했다.

다행히 유통기한이 남아있는 빈혈약


여보 이거 내가 먹으라고 꺼내놨어. 안 먹었지? 빨리 먹어.”

있다가 있다가. 밥 먹고 먹을게.”


그렇게 또 점심을 함께 먹고 난 뒤 우리는 각자 위치로 향했다. 데스크톱을 쓰는 남편이 거실에서, 노트북을 쓰는 내가 방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3-4분 지났을까? 남편이 물이 얼마 남지 않은 2리터짜리 생수통 하나와 빈혈약 한 알을 손에 들고 방에 찾아왔다.


여보! 아프지 말고 오래오래 나랑 같이 살아야지. 자! 어서 먹어. 이게 인생에서 꼭 필요한 거야!!”


남편이 생수통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게 너무 웃겨서 갑자기 웃음이 났다. 약을 건네받으며 묻는다.


큭큭 여보 인생에서 꼭 필요한 건 나잖아?”


남편은 나의 예리한 질문에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이다.


“크크크크 크 정답!!!”


좀 멍하면 멍하나 보다 하고 무신경하게 넘어가는 나라는 사람 옆에 약사처럼 약을 챙겨주는 남편이 있어 오늘도 참 다행이고 감사하다.




문득, 남편이 없었다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내 고집대로, 하던 대로 살아가긴 했겠지만 내가 채우지 못하는 세심한 부분들은 여전히 구멍이 난 채 살고 있진 않았을까?


어지러워도 약 같은 건 잘 안 챙겨 먹었을 것이고 남이 하는 말에 잘도 속아 넘어갔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지금과 같은 안정감과 균형감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얼굴이 누렇다고 걱정하며 빈혈약을 건네는 남편을  통해, 내 삶에 남편이 꼭 필요함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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