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간 찐하게 잘 지내보자!
영국에서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비자 만료일이 다가오고 있고, 비자 만료에 한 달 앞당겨 귀국을 결정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우선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며칠 동안 비 가 내리더니 오늘은 해가 났다.
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며 집을 나선 남편이 1분 만에 전화를 한다.
"여보!!!! 날씨가 봄이다 봄이야"
"진짜?"
"응 진짜 봄이야. 오늘 꼭 시간 내서 산책해. 알겠지?"
"알겠어!"
오전에 해야 할 일을 해놓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에 나섰다. (이럴 때 재택근무는 너무 좋다!)
내가 산책을 하는 곳은 집 앞에 위치한 거너스버리 공원이라는 곳인데, 꽤 큰 규모에 호수도 있고 놀이터도 있어서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자주 오기도 한다.
낮 시간에는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들이 데리고 나온 개들이 엄청 많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사람 반 개 반이다.
날씨가 풀려서 그런지 개들도 신나 보였다. 이 집 할머니와 저 집 할머니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 집 개와 저 집 개도 덩달아 살을 부대끼는 걸 보면서, ‘니들도 친구들이 그리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공기는 더없이 맑았고 기분은 상쾌했다. 밤사이 비가 내렸던지라 땅은 질퍽질퍽했다. 땅이 궂을 거란 걸 경험으로 터득하게 된 나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잔뜩 진흙이 묻어도 닦으면 그만이니까!
여기 현지인(?)들은 대부분 이런 날씨에는 장화를 신고 온다. 헌터 같은 브랜드에서 장화를 괜히 파는 게 아니다. 이런 날씨에 제격이기 때문에 영국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
하지만 때로는 한국에서는 그저 브랜드만 보고 유행처럼 그런 장화를 신곤 한다. 참 한국과는 안 어울리는 데 말이다. 영국에 살아보니, 이들이 왜 이렇게 발목이 길게 올라오는 장화를 신는지 경험으로 알게 됐다. 뭐든지 각 나라마다의 문화와 어울리는 게 따로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나만의 점심시간을 활용한 산책은 계속됐다.
아니 그런데 이게 왠 일!
늘 걷던 길의 코너를 돌아가는데 향긋한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원래 아무것도 없던 장소에 조그마한 커피차가 와 있었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커피를 뽑아 내리고 있었는데, 사람들 몇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치듯, 나도 뇌에서 아무런 생각을 거치지 않은 채 무의식적으로 줄을 섰다.
'커피는 사랑이지!'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아름다운 오후를 향긋한 커피와 함께 보낼 생각에 젖어 있었다.
내 앞에 아주머니들이 사라지고 내 차례가 되어 블랙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커피는 무조건 블랙! 이건 완전히 내 취향이지만, 나는 블랙커피가 좋다. 한 때는 고소한 라테에 빠져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깔끔한 블랙을 선호하게 됐다. 그러고 보면 커피 취향도 나이가 먹을수록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아무튼 커피를 주문하고 옆에 서 있는데 내 앞에 손에 흙이 잔뜩 뭍은 꼬마 아이가
"핫 쵸코~!" 하고 외치며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 원트 핫 쵸코! 핫 쵸코!"
아이 부모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초롱한 눈망울로 할아버지를 간절히 바라보는 아이만 서 있을 뿐이었다.
"아이 돈 노!"
할아버지는 특유의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이는 집요하게 핫쵸코를 외치며 커피차 옆에 서있다. 마스크 안으로 미소 지으며 귀여운 꼬마 아이를 바라보던 찰나에 내가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히여 유 아~"
"땡큐 쏘 머치!"
"바이~!"
친절한 할아버지가 건네는 진한 향의 커피 한 잔을 받아 들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다 마시고 갈 거니까 컵 뚜껑이나 컵홀더는 챙기지 않았다. 뜨거운 커피를 쏟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서서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카....
내 몸에 모든 세포가 행복하다고 소리친다.
오 마이 카페인! 커피! 마이 러브!!!!
호수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유유히 헤엄치는 오리들을 구경하며 커피를 마신다.
'날이 정말 따뜻해졌구나'
문득 고등학교 때 배운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가 생각났다.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듯, 코로나로 갇힌 이 도시에도 봄이 오긴 오고 있었다.
홀로 감상에 젖어 봄을 만끽하며 호로록호로록 커피를 다 마시고 나니 이번엔 종이컵에 100% 퇴비화할 수 있다는 친환경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keep calm and go green
문구가 마음에 들어 사진을 한 장 찰칵 찍고, 내 발걸음은 다시 집으로 향했다.
돌아오는 공원길에서도 나는 많은 개들을 만났다. 갖가지 종류(다 알지는 못하지만)의 개들이 드넓은 공원을 마음껏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에 평화와 자유가 찾아왔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이 광경을 머릿속에 잘 저장해 두고 싶다, 꼭 기억해두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1년 반 째 살고 있는 이 곳 영국은, 돌이켜보면 참 애증 같은 곳이다. 오자마자 거의 바로 코로나가 닥쳐 정말 많은 것들이 힘들었고, 이 곳의 느리고 낙후된 의료 시스템에 수없이 좌절했다.
하지만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드넓은 공원,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만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이 나라의 매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원을 거닐며 들려오는 할머니들의 강렬한 브리티시 악센트마저도 참 멋스럽게 들린다.
떠나기까지 남은 한 달, 한 가지 욕심이 있다면 더 많이 자연을 누리고 싶다.
영국아 그동안 고마웠다. 남은 한 달도 잘 지내보자! 부디 비 말고 좋은 날씨를 선물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