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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옹 Mar 12. 2021

귀국, 그리고 잠 못 드는 밤

12일째 격리를 하는 중인데 말이죠

영국에서 마지막 휴가를 사용해 런던 근교라도 좀 돌아보고 콧바람을 쐰 뒤(?) 3월 중순쯤 귀국하려고 했던 우리 가족은 서둘러 귀국 일정을 당겼다.


런던에서 Teir4라는 높은 단계의 봉쇄조치가 풀릴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아이와 나, 남편은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마트, 집 앞에 공원 외에는 갈 곳이 없는 우리들을 받아주는 곳은 103 firestone house, 우리 집뿐이었다.


마침 집 렌트도 2월 말까지로 되어 있었고, 더 이상 추가적인 연장을 해서 비용을 지불하느니, 빨리 귀국을 서두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너무 오랫동안 못 봐서 몸 단 아이를 지켜보는 것도 참 안쓰러웠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2월 27일, 독일을 경유하는 루프트한자에 몸을 실었다.프랑크프루트에서 6시간을 대기하고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때는 독일 시간으로 오후 6시를 지나고 있었고, 공항에서 긴긴 대기를 하면서 쉴 틈 없이 걸어 다니고 공항 놀이터에서 진을 뺀 아이의 눈꺼풀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비행기가 고도를 올려가는 찰나, 아이는 스르륵 잠이 들었고 저녁 기내식을 먹자고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통에 푹 재우는 게 낫겠다 싶어 두 다리를 뻗을 수 있도록 옆으로 몸을 뉘었다.

이륙 중에 잠에 빠지심


영국 시차에 완벽히 세팅된 나와 남편, 아이의 몸은 정확히 밤을 인지했고, 비행기 불이 꺼지자마자 헤롱 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특히 남편의 경우 비행기에서 잠을 거의 자지 못하는 편인데, 이륙한 지 한두 시간 만에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다행히 기내에는 빈자리가 많았고, 남편과 나는 비스듬히 몸을 누워 올 수 있었다.


아이는 총 비행시간 10시간 가운데 7시간 넘게 자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줬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더니 말똥말똥한 눈망울로 내게 물어왔다.

"엄마 여기가 한국이야?"



그렇게 한국 땅에 도착한 건 2월 28일 일요일. 낮 12시에 도착한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남편의 PCR test 결과지에 생년월일이 잘못 기입돼 있었지만 다행히 여권 번호가 맞아서 풀려나,) 검역소를 빠져나왔다.


우리처럼 영국이나 독일 등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들은 경찰의 지시에 따라 버스에 탑승했고, 공항 인근의 하얏트 호텔로 옮겨졌다.


콧구멍을 통과해 목젖까지 닿을 만큼의 치명적인 면봉 공격을 받고 우리는 각자 방을 배정받았다. 내가 아이와 머물기로 했고 남편은 방을 따로 써야 했다. 다음날, 모두 음성으로 결과를 확인받은 우리는 드디어 자가 격리 장소로 향할 수 있었다.



우리 세 식구의 자가 격리를 위해 집을 내어주신 건 아이의 증조할머니다. 할머니는 우리가 2주간 할머니 댁에 머물 동안 인근의 다른 할머니 댁에 잠시 거쳐하신다고 하셨다.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면서, 2주라는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야 할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격리 Day 1

넓은 거실에 그토록 갖고 놀고싶어하던 한국에 두고 온 장난감, 할머니가 사다주신 이불까지 있으니 아이는 잔뜩 신이 났다. 우리가 살던 런던 집에 비하면 할머니 집은 대궐 같았다. 런던에 가기 전엔 전혀 못 느꼈는데, 워낙 런던 집들은 평수가 크지 않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작은 집에 익숙해져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발차기를 하고 춤을 추면서 넓은 거실을 휩쓸고 다녔다. 낮잠을 재우지 않았더니 밤 11시쯤 잠에 들어 다음날 아침 10시쯤 일어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였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여전히 낮밤이 바뀌어 있었고 긴긴밤 눈이 퀭해질 때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격리 Day 2, Day 3

영국에서 저녁 7시 반~ 8시 사이면 잠에 들었던 아이는 이제 그 패턴을 회복해 나갔다. 이것저것 장난감 놀이를 하고, 런던 집에는 없던 티비를 통해 어린이 프로를 조금 보고 저녁을 먹고 나면 이내 졸려했다.

누우면 잔다... 부러웡

하지만 여전히 나와 남편은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해도 보고 걷고 하면 훨씬 시차 적응이 쉬웠을 텐데 집에만 있다 보니 이게 생각대로 되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격리 Day 4,5,6,7,8,9,10,11,12

그 후로 아이는 완전히 안정적인 본인의 수면 패턴을 쭉 이어오고 있다. 저녁 7시 50분쯤 넘어가면 눈이 침침한 어르신처럼 눈을 비빈다. 양치를 하고 자리에 누워 휴대폰 불빛을 비춰 그림자놀이를 5분 정도 하고 나면 하품을 하암~ 한다. 그러고 나서 무서운 꿈을 꾸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뒤 등을 살살 긁어주면 이내 잠에 빠진다.


남편과 나는 '어차피 격리가 끝나면 시차도 적응되겠지' 하는 약간의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지내고 있다. 솔직히 잠을 너무나 잘 자는 나로서 밤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은 꽤나 큰 스트레스였다. 아무리 누워서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으니 심지어 없던 화도 생겨 났다. (나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야행성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


그렇게 멀뚱히 누워만 있다가, 언제부터인가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그냥 거실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메일을 확인하고, 해야 할 일들을 좀 처리하고, 찾아볼 정보들을 찾아보고..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보통 새벽 3,4시. 그쯤 돼서 다시 자려고 누워도 한두 시간은 뒤척인다. 시간을 정확히 확인하지는 않지만 보통 새벽 5시가 넘어야 겨우 잠에 드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도 밤 12시인데, 나에게는 마치 점심 12시처럼 산뜻하고 맑고 가벼운 기분이 든다.)


이렇게 새벽에 잠에 들면 보통 아침 10시 11시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데, 아침 7시 전에 깨는 아이는

"엄마 일어나, 이렇게 자면 밤에 잠 못 잔다?" 하면서 나를 설득한다. (똑똑한 녀석)

하지만, 아이 따라 거실에 나와도 거실에서 비몽 사몽. 그러면 이때 잠에서 깬 남편이 나를 더 잘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남편의 경우 다행히도 나와 약간은 다른 시차 부적응을 보이는데, 남편은 주로 오후 2시~3시가 넘어가면 사경을 헤맨다. 그때부터 자기 시작해 아예 밤까지 자는 경우도 있고 저녁때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자기도 한다. 그래서 남편은 나보다 아침에 잘 일어난다. (여기서 강조하자면, 남편은 조기축구하는 날 외에는 아침 7시에 일어나지 않는, 평생을 야행성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아이는 완벽한 한국 시간으로 살고 있고, 나와 남편은 여전히 영국 시간으로 (스스로의 행성: 주행성과 야행성에 맞춰-) 한 공간에 살고 있다.


'이제 우리도 3일 뒤 바깥공기를 마시고 햇빛을 보게 되면 한국의 시간으로 살아갈 수 있겠지!'


누우면 5분 안에 자는 게 일상이었던지라,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오는 이 불면증이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이제 격리의 날도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어 희망적이다.


 안에서만 심심할 텐데, 이제  밤만 자면 할무니  간다며 잠에  기특한 아이에게 감사하며, 남은 이틀 반의 격리 생활도 야심차게, 야행성으로다가, 야무지게, 살아볼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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