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카멜레옹 Apr 03. 2021

한국이 좋아요 - '샤워기수압'편

샤워나 목욕을 자주 합니다

한국에 온지도 어느덧 한 달이 흘렀다. 그중 2주는 자가 격리를 해서 그런지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 느낌이다. 영국에서 1년 반을 살다가 한국에 오니 영국에서 누리지 못했던 많은 것들이 감사함으로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우리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샤워기 수압이다.



때는 1년 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에서 욕조가 있는 집을 구해서 너무 좋았는데, 문제는 보일러였다. 뜨거운 물을 틀다가 5분만 지나면 찬 물로 바뀌어 버렸다. 보일러 수리공이 수차례 우리 집을 들락날락했지만 문제는 고쳐지지 않았다. 그렇게 추운 겨울을 찬 물로 버텨야 했던 우리는, 어찌어찌 살다 보니 드디어 나름의 해결책을 발견했다. 샤워기 수압을 세게 틀지 않고 졸졸졸- 흐르도록 작게 틀어두니 뜨거운 물이 계속 나왔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보일러 수리공을 부르지 않고, 졸졸졸 흐르는 샤워기 수압에 의지해 샤워를 했다. 급할 때는 샤워를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꼭 욕조에 미리 물을 받아 놓고 (보통 20분 정도 물을 틀어놔야 한다) 목욕을 했다. 비록 수압은 약했지만 미리 물을 받아놓으면 되니까 따뜻한 물에 목욕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한국으로 입국한 날, 우리 가족은 공항 근처 하얏트 호텔에서 코로나 검사를 받고 방을 배정받았다. 아이와 내가 한 방을 쓰고 남편은 다른 방으로 찢어졌다. (3인 이상은 함께 머무를 수 없는 규정 때문이라고 했다.) 아이와 나는 스위트 룸이라고 하는 넓은 방을 사용하게 됐는데, 키를 꽂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넓디넓은 방에 감동한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짐을 풀고 정리를 하는데 전화가 울렸다. 남편이다.


"(상기된 목소리로) 여보!! 빨리 목욕해!"

"왜?"

"우리 30분 받던 물이 여기는 3분이면 끝나. 장난 아니야. 어서 목욕해봐!"

"크크크 진짜??? 알겠어!"

"응 지금 목욕하고 애기 자면 또 해!!!"

"알겠어!!"


콸콸콸 넘치는 수압과 온도에 감동한 남편이 서둘러 내게 전화를 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여 있었다. 수압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럴까. 나도 궁금해져서 목욕을 서둘렀다.


"후찬아!! 목욕하자!! 여기 물이 엄청 잘 나온대!!"

"진짜? 예~~ 목욕하자~~"


훌러덩훌러덩 옷을 벗어던진 아이는 욕조로 냉큼 달려들어갔고, 나는 런던의 물줄기보다 50배쯤은 더 강력한 폭포수 같은 수압을 경험했다. 신나게 목욕한 뒤 남편 말처럼 아이가 잠들고 한 번 더 반신욕을 할까 생각했지만 시차에 허덕이던 아이와 나는 이내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후 자가격리를 했던 할머니 댁에서도 우리의 수압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호텔이어서 수압이 잘 나왔던 것이 아니라, 그냥 한국이어서 수압이 다 센 것 같았다. 집에만 있으니 시간도 잘 안 가서 매일매일 일과에 목욕을 집어넣고 1시간씩 목욕을 했다.


"아이고 좋다. 아이고 좋다."


따뜻한 물이 시원하게 나오는 샤워기를 어깨에 걸쳐 놓은 채 희미하고 뿌연 수증기 속에서 또렷한 행복을 맛보았다. 그렇게 한국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들이 쌓여갔다.



한국에 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여전히 나는 콸콸 넘치는 수압을 접할 때마다 감동한다. 영국에서 여러 모로 고생했지만, (집에 쥐가 나오고, 보일러는 계속 고장 나고, 코로나로 계속된 감금생활(?)까지..)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샤워기 수압 하나에 감사하지는 못했을 것 같다.


이래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 하는 걸까? 한국에서 누리는 소소한 일상들이 참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작가의 이전글 귀국, 그리고 잠 못 드는 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