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마주한 복병

평화는 먼 곳에 있지 않다

by 짠맛토커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뒤덮은 후 나의 직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매일 한 시간이 넘는 출근길에 올라야 했던 나는 재택근무라는 신문명을 접하게 됐다. 정확히 올해 3월 21일부터 재택근무가 시작됐으니 벌써 4개월 째다.

하지만 주말에 돌아가며 하는 근무는 사무실에서 처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사무실로 가야 한다. 오늘은 내 차례였다.


오늘 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을 맞이했다. 일어나 멍하게 조금 앉아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이에게 먹을 것들을 차려주고 커피를 마셨다. 모닝커피는 육아를 하면서부터 마시기 시작했다. 아이가 어릴 때는 늘 잠이 부족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커피부터 마시게 된 게 이제는 완전한 습관이 돼 버렸다.

재택근무를 할 때는 커피를 몇 잔 마시든 관계없이 편하게 화장실을 갈 수 있기 때문에 4개월 동안 별로 의식 없이 커피를 마셔왔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나는 오랜만의 사무실 출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집을 나서고야 말았다.



지하철역까지는 약 15분 걸어가야 하는데, 피곤하거나 비가 올 땐 버스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버스 1번에 1.5파운드, 그러니까 약 2200원이 넘기 때문에 웬만하면 아침에는 주로 걷기를 선택하는 편이다.

집 밖을 나오니 날씨도 선선하고 적당히 시원해서 참 걷기 좋은 날씨였다.


'그래, 며칠 동안 집에만 있었고 운동도 못했으니, 오늘은 좀 걷자!'


어딘가로 향하는 자동차들을 감상하며 15분을 걸어 드디어 지하철역에 도착했다.

8분가량 기다린 뒤 지하철이 도착했다. 주말 아침인지라 자리는 대부분 비어 있었다.

'코로나가 닥치기 전에는 앉아서 가는 날은 횡제 하는 기분이었는데.. '

일상 참 많은 것들이 바뀌어 있었다.

앉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지하철 플랫폼의 테이핑된 의자들



한 켠에 자리를 잡고 앉은 나는 브런치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터라 이 플랫폼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 더 살펴보고 다른 작가들이 쓴 글들도 읽어보느라 분주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장에서 특정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정은아, 나 배 아파. 네가 아침에 커피를 마셨잖니?'


아뿔싸. 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지 않은 채 집을 나와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이상하게 커피만 마셨다 하면 화장실을 잘 가는데, 잠을 깨워준다는 것 외에 화장실을 잘 가게 해준다는 커다란 장점 때문에 나는 커피를 끊지 못하고 있다.


아무튼 이때부터 시작된 고통은 점점 더 나를 죄여 왔다.



오늘따라 지하철이 더 느린 것 같다.

왠지 더 많은 역을 정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착각에 빠진다.

몸을 대각선으로 한 번 뒤틀어 본다.

어느새 팔에는 닭살이 돋기 시작한다.

어떤 호르몬의 장난인지 모르겠지만 입 안엔 침이 고인다.

시간이 빨리 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주변의 사람들을 관찰한다.

평온해 보인다.

나만 빼고 모두가 평화롭게 핸드폰을 보고 있다.

조용히 소리 없는 가스를 배출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지침으로 내 옆에 아무도 앉지 않았다.

다행이다.

조금이나마 가스를 배출하고 나니 잠시 평화가 찾아온다.


제발.


이제 환승 후 두 정거장만 가면 된다.

평온의 시간은 찰나와 같이 흘러가 버렸다.

다시 좁은 간격으로 배출의 욕구가 나를 조여 온다.

마치 출산을 하던 날의 태동을 느끼던 기분이랄까.

입안 가득 모여있던 침을 꿀꺽 삼키며 다짐한다.


'참을 수 있어.'

'난 참을 수 있어.'


대각선에 앉은 금발의 아주머니가 유독 평화로워 보인다.

그녀의 평온함을 가지고 싶다.



드디어 내가 환승해야 하는 빅토리아역에 도착했다.

런던의 지하철엔 왜 화장실이 없는 걸까?

한국 같았으면 환승역에서 내려서 문제를 해결했을 텐데.

속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역시 걷는 게 좀 더 낫다.

바쁘게 허벅지 근육을 움직이니 내 장도 잠시 주춤하는 눈치다.

급한 미팅이 있는 사람처럼 잰걸음으로 걸어간다.


"띵띵 띵"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는데 갈아타야 할 지하철이 들어온다.

앗싸.

더욱 바삐 발걸음을 옮긴다.

플랫폼에 도착하자 나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린다.

지하철 문 열리는 게 이렇게 반가운 건 오늘이 처음이다.

여기선 두 정거장만 가면 된다.



나는 또다시 잰걸음으로 회사를 향해 걸어갈 것이다.

바삐 움직이는 다리 근육에 놀라 장기들이 잠시 주춤할 수 있도록.

5분이면 된다.

나는 곧 평화를 맛볼 것이다.

대각선에 앉아 휴대폰을 탐색하던 그 아주머니의 평화를!



재택근무가 가져다주는 장점들에 몸이 너무 적응해버린 탓에 오늘은 출근길에 예기치 못한 복병을 마주했다.

다행히 모든 것은 평화롭게 해결됐다.

하지만 20분 남짓의 기록들(파란색 글씨)은 세세히 남아 있다.



기록하지 않았다면 잊혔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이래서 글을 쓰는 걸까?

잊지 않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간직하기 위해. 추억하기 위해.

어쨌든 오늘 작은 에피소드를 기록하면서 나만의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깨달음 하나,

"평화는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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