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 땡큐땡큐해서 나도 땡큐 할란다

영국 외노자의 땡큐

by 짠맛토커

일요일 아침. 나는 또다시 돌아온 주말 근무로 나갈 채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한다. 집에서 일하면 이 모든 과정을 싹- 생략할 수 있는데. 사무실 출근이 이제는 좀 귀찮다는 느낌도 든다. 몸은 무겁고 머리는 띵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출근. 버스비를 아끼려면 일단 지하철까지 걸어가기. 지하철에 오르는데 그 긴 플랫폼에 사람이 달랑 나 하나다.




오늘은 딱히 뭘 열심히 읽거나 보거나 하고 싶진 않아서 멍하니 간다. 이런저런 생각(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갈아탈 역이다. 환승을 하고 드디어 옥스퍼드 서커스 역에 하차했다. 내가 항상 나오는 출구가 있는데, 계단을 다 올라오면 늘 계시는 노숙자 한 분이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 분과 가장 먼저 마주한다. 길 건너 다른 출구(이 출구는 집에 갈 때 지하철을 타기 위해 들어가는 입구) 앞에 늘 계시는, 초록색 이불을 덮고 있는 두 번째 노숙자 분과 마주한다. 항상 그 자리를 지키시는 분들이라 가끔 안 보이면 걱정된다.


그렇게 노숙자 두 분을 뵙고 난 뒤(?) 회사로 걸어간다. 파란 천에 하얀 글씨로 써 놓은 저 THANK YOU 문구. 코로나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저렇게 땡큐 땡큐, 땡큐 타령이다. 뭐가 그리 감사한 게 많은지 땡큐 히어로 땡큐 NHS.. 최전선에서 일하는 의료진들을 위한 땡큐로 영국 땅을 도배했다.


물론 고생하는 의료진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건 맞지만, 영국 의료시스템은 정말 한국인 입장에선 너무 느리고 답답하기 때문에 솔직히 별로 땡큐가 안 나왔다. 거의 사람이 죽어갈 지경이 되어야 겨우 약도 주고 항생제도 처방해준다. 웬만해선 항생제를 절대 주지 않는다. 물론 항생제를 남용하는 것도 문제지만, 아이 키우는 엄마 입장에선 아이가 아플 때 제 때 의료 지원을 받지 못하면 정말 답답하기 때문에 무상 의료 서비스를 자랑하는 영국의 NHS에 대해서 나는 다소 부정적이다.




오전에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먹을거리를 사러 다시 거리로 나왔다. 식당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아 빵집에서 샌드위치 하나를 산다. PAUL이라는 프랑스 빵집인데, 체인이라서 영국 어디서든 흔하게 볼 수 있다.

다시 사무실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파란 깃발에 적힌 땡큐와 하얀 구름, 파아란 하늘이 참 예쁘다는 생각을 한다. 몇 컷 찍어본다.



빵을 사서 사무실에 들어와 혼자 먹는다. 주말이라 우리 팀에 출근한 사람은 나뿐이다. 혼자서 '나 혼자 일한다' 한 편을 찍고 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무는데 왠 걸. 빵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다. 어제 만들었는데 안 팔려서 진열해 둔 빵이 틀림없다. 살짝 실망했지만 그래도 배는 고프니 딱딱한 부분은 빼고 먹는다. 외노자의 삶이란 이렇게 딱딱하게 말라버린 빵처럼 건조하고 목 막힐 때가 있다. 촉촉한 우유 한 모금이 마시고 싶다.




오후까지 일을 다 마치고 5시가 넘어 회사를 나왔다. 낮엔 그렇게 화창하더니, 이젠 또 비가 내린다. 일기 예보를 도통 믿을 수가 없다. 해는 나는데 비는 뿌리는, 소위 우리가 '호랑이 장가 간다' 또는 '여우가 시집간다'고 표현하는 그런 날씨가 영국에선 꽤 자주 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며 땡큐가 쓰인 파란 천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보니, 땡큐, 즉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건 좋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여기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불편함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땡큐를 외치는 것! 땡큐는 전염되는 걸까. 자꾸 땡큐라는 글자에 집중하니 나도 누군가에게 땡큐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로 오늘의 땡큐를 헤아려본다.

출근길에 화장실을 찾지 않고 내 장이 편하게 왔으니 땡큐

날씨가 맑고 화창하면서 이쁜 구름까지 걸려있는 하늘을 봤으니 내 눈이 호강해서 땡큐

비록 딱딱한 빵 조각이었지만 그래도 내 위의 배고픔을 달래주었으니 땡큐

땡큐 사진을 찍어서 짧은 조각의 글을 써볼 수 있으니 내 영혼이 만족해서 땡큐

비록 비는 왔지만 그래도 무사히 집에 잘 도착했으니 땡큐

집에 돌아와서 따뜻한 반신욕을 했으니 내 몸이 쉼을 얻어 땡큐

남편이 아이와 함께 놀이터를 가며 잘 돌보아 주었으니 내 평생 친구에게 땡큐

이제 영국도 가게, 버스, 지하철에서 무조건 마스크를 써야 하니 서로의 안전을 지킬 수 있어 땡큐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을 건강히 잘 살아냈으니 그것 또한 땡큐


땡큐 땡큐 하다 보니, 진짜 땡큐 할 것들이 많다. 감사함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 저 깃발에게도 땡큐. 앞으로는 삐딱한 시선보단, 좀 부드럽게 저 땡큐 깃발을 바라봐야겠다.


'그래, 영국아! 네가 하도 땡큐땡큐해서 나도 땡큐 할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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