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관생도 시절 Chapter 3. 구보
"구보?
아홉 발자국을 걸으라는 건가?
오늘부터 3보 이상은 구보로 간다는데, 구보가 뭐죠?"
가입교 훈련이 시작됐다. 내가 제일 처음 접하게 된 훈련의 시작은 다름 아닌 구보였다. 난 사실 처음 구보라는 말을 듣고 말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구보가 뭐지? 알고 봤더니 구보는 뛰는 거였다. 구보는 사실 일본식 표현인데, 군대에는 일본식 표현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그냥 달리기라고 하면 되지, 구보는 정말 입에 안 붙는다.
하지만 나는 20대 내내 군생활을 하면서 이 구보라는 말을 수천 번도 넘게 들었다. 아침 구보, 구보 실시, 구보로 간다, 구보 열외, 구보에서 낙오하지 마. 구보, 구보, 그놈의 구보!!!!!
난 화생방 가스를 먹는 것보다 구보로 화생방 훈련장까지 가는 게 더 힘들고 싫었다. 무거운 총기를 앞에 들고뛰기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여중, 여고 다니며 공부만 했던 내가 군대에 와서 구보를 하려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 몸이 '구보'에 익숙해지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중대는 4명씩 키 순으로 정렬돼 있었다. 당연히 여생도들은 맨 끝이다. 내가 속한 중대의 맨 앞 줄엔 180cm가 넘는 장신들이 서 있었다. 그중 한 명은 190cm은 족히 되어 보였다. 언제 어디서나 출발은 그 장신들부터다. 내 키도 168cm로 여자치고는 큰 편에 속하지만, 맨 뒷줄에 서 있는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여생도들은 우선 다리 길이에서부터 그 장신들에게 밀렸다.
그리고 총기의 무게는 약 3.2kg으로 동일한데, 180cm의 장신이 3.2kg을 드는 것과 168cm인 내가 3.2kg을 드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달리기를 잘 못했다.
이 세 가지 합리적인 이유들을 바탕으로 나는 구보를 정말 못했다. 근데 가입교 훈련 내내, 정말 3 발자국 이상은 다 뛰어갔다. (지금 생각해도 소름 돋는다!) 매일같이 그 무거운 총을 들고 180cm 이상의 기럭지들이 뽑아대는 초반 스파트를 따라가기란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가입교 훈련은 '삶에서 이 정도의 극한의 고통이 존재할 수 있다'라는 걸 경험해 주기 위한 훈련인 듯했다.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1명의 예비 여생도가 생도대를 떠났다. 분명 그도 상상 이상의 극한을 경험한 뒤 '난 이렇게 못살아'라고 결심한 모양이었다.
콧물이 얼어붙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연병장에서 갖가지 제식과 총검술, 기초 군사훈련을 익혔다. 절대 내복 따위는 입지 않던 내가 학교에서 보급해준 누런색 내복도 든든히 입었고 귀마개도 했으니, 얼굴 빼고는 많이 춥지는 않았다. 연병장에서 새로운 걸 배우는 건 그래도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적의 목을 따는 좌 베어와 우 베어! 막고 차고 돌려 쳐를 훈련할 땐 잠시나마 전투 중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하지만 연병장에서의 훈련이 끝나면 또 달려야 했다. 밥 먹으러도 뛰어서 가고, 씻으러도 뛰어서 가고, 내무실도 뛰어서 간다. 구보가 무서웠지만 무섭다고 포기하면 난 맨날 낙오자가 될 뿐이다. 난 이를 악물고 뛰었다. 진짜 이를 악문다는 게 어떤 건지 이때 경험했다.
'구보. 네가 나를 힘들게 해? 내가 너를 이겨주겠어.'
그렇게 빠드득빠드득 이를 갈아가며 뛰니 조금씩 요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일단 구보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호흡이다. 숨만 제대로 쉬고 내뱉어도 절반은 성공이다. 선배들은 '습습 하하' 호흡법을 알려줬는데, 코로 '습습' 하면서 들이마시고 입으로 '하하' 하면서 내뱉으라고 했다. 말이 쉽지 이게 완전히 익혀지기 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계속 뛰어봐야 한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더랬지. 매일매일 많은 시간을 달리니 어느덧 내게도 '습습 하하'가 무엇인지 깨달아지는 날이 왔다. 코로 숨이 들어가고 입으로 나오면 폐에 큰 무리를 주지 않고 오래 뛸 수 있게 된다. 이 '습습 하하'를 체득한 뒤 나도 조금씩 구보에 자신감이 붙었다.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구보라는 무시무시한 말은, 사실 평범한 달리기에 불과했다. 물론 총을 들고뛴다는 점이 일반 달리기와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제까짓 게 그래 봤자 달리기다.
내가 만약 이 구보를 계속 무시무시한 괴물로 생각했더라면, 난 훈련 내내 낙오만 하는 그런 연약한 여생도로 남아있었을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그 말은 진짜다. 구보를 괴물이 아니라 '내 밥이다' '내 껌이다' 생각하니 진짜 내 밥과 껌이 되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난 달리기를 좋아한다!)
매일 밤, 훈련이 끝나고 내무실에 돌아오면 맨소래담을 온몸에 발랐다. 싸-한 냄새와 화-한 느낌의 피부 자극으로 근육통을 완화시켜주는 데 아주 제격이다. 맨소래담의 이 싸-한 냄새에 익숙해져 갈 때 즈음, 내 몸엔 '근육'이라는 게 붙고 있었고 내 마음엔 '자신감'이라는 게 생겨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