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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Oct 19. 2020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

고쿠분 고이치로 -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나의 생은 혐오스런 시대에 영위되었다. 나는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게 세상에 태어났다. 지금 난 무엇에나 불편한 심기를 느낀다. 이전에 태어났다면 난 시대를 향유했을 것이고 이후에 태어난다면 재건에 힘쓸 터인데 오늘날 난 내 삶을 허물어져가는 건물을 떠받치는 데 소진하고 있다. - 클레멘스 벤첼 폰 메테르니히, 《비망록》

                        (『보수혁명-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 전진성(책세상, 2001), 18쪽에서 재인용.)


 제1차 세계대전이 참혹한 결과만을 남겨놓고 끝난 이후, 유럽인들은 지독한 지루함 속으로 침잠하고 있었다. 직전의 재앙이 분명하게 보여준 것은 그 전까지 유럽의 근대정신을 지탱해왔던 이성, 휴머니즘, 자유와 같은 가치들은 이제 그 효용을 상실한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낡은 가치들을 대신할 새로운 가치들, 단단한 대지 위에 땀 흘려 새로운 유럽을 세울 수 있는 원칙들을 찾고자 했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그들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아마도 다수의 유럽인들은 마르크스-레닌의 공산주의가 단지 낡은 과거의 이념들을 붉게 칠해 새로운 것처럼 포장한 것에 불과함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헤겔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자리에서 마르크스는 그것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말할 뿐, 결국 역사의 종말, 자유롭고 이성적인 개인들이 더 이상 투쟁도, 혁명도 없이 살아가는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그런 세상이란 존재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세상은 오히려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음에 따른 폭력성의 농축과 더 재앙적인 전쟁만을 불러오리라는 것을 경험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뭐지?” 유럽인들은 새롭게 투신할 수 있는 대상을 갈구했으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낡고 쓰러져가는 집에서 온갖 불평과 불만을 내뱉다가 결국은 지독한 지루함 속에서 잠이 올 수밖에 없었다. 불평과 불만조차도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일 때나 가능한 것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저 자포자기의 상태로 극도의 지루함, 즉 권태를 느낄 뿐이다. 무언가를 하고 싶지만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저 누워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을 맞지 않는 이상 잠은 깨어져야 한다. 유럽인들은 누구보다 강렬하게 잠에서 깨어나길 원했다. 그들은 무능한 자신의 시대를, 그리고 지루함 속에서 자신의 삶을 낭비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으며, 무엇인가가 자신을 지루함의 잠에서 깨워 새로운 시대를 건설하는 일터로 내보내주길 격렬하게 욕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뮌헨의 한 맥줏집에서 특이한 콧수염을 한 남자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메테르니히의 『비망록』은 100여 년 전에 쓰였지만, 지금 시대의 정서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역사의 발전은 인류가 근대의 진정한 대안을 발견해냈기 때문이 아니라, 대안부재에 대한 체념과 전쟁으로 인한 물리적인 파괴 때문이었다. 자본주의가 자신 안에 내재된 모순의 심화를 주기적인 공황으로 기성의 자본을 소각하고 새로운 자본의 운동을 만들어 은폐하는 것처럼, 근대정신 역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대공황을 통해 단지 자신을 새롭게 포장해 다시 역사의 종말을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자본의 형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자본주의의 본질과 그 모순적 성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근대정신이 민족(Nation)과 소비에트의 시체 위에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자신의 복권을 주장한다한들 비이성적인 이성, 부자유한 자유라는 그 자신의 모순적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게 뭐지?” 백 여 년 전 유럽인들이 던졌던 물음은 그 답을 얻지 못한 채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현재 역시 그에 대한 답은 얻어지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와 근대정신에 대한 파산선고가 이미 한참 전에 내려졌음에도 지루한 시대는 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한, 그 시대는 무너져가는 집에서 단지 견뎌내기만 하는 지루한 시대, 시간이 의미를 갖지 못하고 하루빨리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대이다. 그렇기에 지루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지루해한다. 다시 말해, 권태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무언가 이 지루함을 벗어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모르기에, 그럭저럭 유지되는 삶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갈 뿐이다. 변화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강해지는 만큼 대안의 부재에 대한 절망 역시 깊어지고 있다. 그 틈새로 민족이 인간의 망각을 먹으며 무덤 속에서 다시 기어 올라오고 있다.      


 도대체 왜 인간은 지루해하는 것일까? 애초에 인간이 지루해하지 않았다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성격이었다면 지루해할 일도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지루함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도대체 지루함이란 무엇일까? 지루함을 없애버릴 수는 없을까? 그럴 수 없다면 지루함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고쿠분 고이치로는 바로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고이치로는 인간의 지루함에 대한 파스칼의 분석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그가 방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을 줄 모른다는 사실에서 유래한다.”(Blaise Pascal, 『팡세』, 이환 역(민음사, 2003), §139, 137쪽) 파스칼은 인간이 가만히 누워서 휴식하고 있기만 할 수 없기 때문에 토끼 사냥, 도박, 대화, 전쟁 등을 하고 그로부터 다양한 불행들을 기어코 겪게 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도대체 왜 가만히 있지 못하고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가만히 있으면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 자신의 조건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무력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삶의 조건, 그리고 그것을 깊이 생각할 때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위로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한 우리의 조건의 자연적 불행으로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ibid. 138쪽) 인간은 이러한 자신의 존재의 무의미(가치)함, 필연적인 소멸을 떠올릴 때마다 지독한 허무와 무력감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전적인 휴식상태에 있는 것처럼 인간에게 참기 어려운 일은 없다. 이때 인간은 자신의 허무, 버림받음, 부족함, 예속, 무력, 공허를 느낀다. 이윽고 그의 마음 밑바닥에서 권태, 우울, 비애, 고뇌, 원망, 절망이 떠오른다.” ibid. §131, 93쪽)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를 갖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밖으로 나가 활동함으로써 온갖 고생과 괴로움을 감수한다. “사람들이 찾는 것은 … 그런 생각에서 마음을 돌아서게 하고 우리의 기분을 전환시키는 소란, 바로 이것이다.” (ibid. 138쪽~139쪽) 


 그런데 인간은 약 1만 년 전에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시작하는 ‘정착혁명’이 발생하면서부터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시간이 매우 줄어들게 되었다. 늦어도 400만 년 전에는 출현했던 초기 인류는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해 유목활동이 어려워짐에 따라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착혁명에 따른 생활양식의 변화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에서 직접 감각하고 경험하는 외부세계의 범위가 상당한 정도로 축소된다는 점이다. 유목인들은 끝없이 새로운 초원을 찾아서 떠돌아다닌다. 즉, 그들의 생활반경은 정착민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반면에 정착민은 일평생 같은 곳에서 반복되는 풍경을 보면서 매일, 매년 반복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지루함을 낳는다.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무언가 기분전환을 위한 다른 일을 찾아 헤맨다. 유목민으로 살 때는 그러한 기분전환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유목민은 계속해서 변화하는 자연에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유목민은 자연으로부터 끊임없이 다르게 주어지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능력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착민은 그럴 기회가 제한된다. 한 곳에 머물러 살아가기 때문이다. 아무리 변화무쌍한 곳이라도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변화 역시 반복되는 변화일 뿐이다. 정착민일지라도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은 동일하기에 자신의 운명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적으로 반복되는 정착민의 삶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그러한 상태가 지속되면서 정착민은 지루함에 빠진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어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는 것이다. 메테르니히가 그랬고, 지금의 우리가 그렇듯이.     


 물론 유목민의 삶으로 되돌아가면 되는 것 아니냐는 물음이 가능하다. 그러나 외부 환경이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에 정착민이 되었다는 사실을 차치하더라도, 단순한 과거로의 회귀는 오히려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다. 민족의 피와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일어나고 있는지 떠올려보라! 또한 정착민과 유목민의 삶은 우열 또는 선악의 관계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삶일 뿐이다. 정착민의 지루함은 그 극복의 과정을 통해 문명을 낳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므로 지루함에 대한 보다 섬세한 분석과 그 해결책이 논의되어야 한다.      


 정착혁명은 지루함을 낳긴 했지만 모두가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지루함의 불평등이 있었다. 정착 공동체가 등장한 이후에도 역사 속의 수많은 인간들 중 절대다수는 매우 빈곤한 상태에서 장기간 노동을 해야 했다. 이들은 지루할 틈조차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나가야 했다. 반면에 이들의 노동과 그 결과물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쌓아올릴 수 있었던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지루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노동에서 면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해야 할 노동은 하층계급에게 떠넘겨졌고, 그 결과 무언가 하지 않고 한가하게 지낼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근대사회의 발전은 한가함을 누릴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지루해질 수 있는 사람의 수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의 대다수는 이전의 전통적인 귀족계급에는 속하지 못했던 사람들이다. 나아가 20세기 대중사회의 등장은 대부분의 중산층에게까지 지루할 권리가 보장되도록 만들었다. 바로 이 지루함의 평등화가 자본주의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지면서 근대 사회에 특징적인 한 가지 문제를 낳는다.     


 근대 사회에는 이전과 달리 수많은 사람들이 지루함에 빠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무언가를 강렬하게 욕망한다. 자본주의는 그 욕망에서 이윤창출의 기회를 포착한다.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때 소비는 단순히 화폐를 지불해 어떤 상품을 사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행위는 일회성에 그칠 수밖에 없으며, 소비의 반복 주기 역시 매우 길어진다. 그런 행위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이윤창출이 아닌 상품의 사용가치이기 때문이다. 일단 만들어진 통신수단으로서 핸드폰의 가치는 약정기간인 2년보다 긴 것이 보통이다. 또한 상품의 사용가치는 개인마다 분명한 한계가 있다. 아무리 핸드폰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사용하는 핸드폰의 개수는 획기적으로 증가하기 힘들다. 요컨대 상품의 사용가치는 자본이 통제하기 힘들다. 오히려 사용가치에 초점이 맞추어질 때 거래에서의 주도권은 구매자에게 있다.     


 따라서 자본은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상품이 상징하는 관념과 기호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상품이 아닌 관념과 기호를 소비하도록 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상품의 사용가치에 비해 관념과 기호는 전적으로 상품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본의 손에 달려 있으며, 그러한 의미의 변화는 이론적으로 무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상품의 등장은 그것의 사용가치의 측면에서 소비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최근에 나온 새로운 것, 그래서 최고의 것이라는 광고를 통해 포장된 이미지의 측면에서 소비를 자극한다. 그리고 새로운 것은 무한정하게 새롭게 나올 수 있으며, 새로움이라는 이미지를 상품에 부여하고 그것으로서 소비를 부추기는 데에는 자본의 힘이 절대적이다. 개성적이고 힙하기를 요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관념과 기호를 소비하도록 어떻게 요구할 수 있을까? 바로 그러한 관념과 기호가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바로 이 물건, 보다 정확히는 이 물건의 기호를 소비함으로써 채울 수 있다는 환상이 자본주의의 체계 속 각종 매체들을 통해 쏟아져 나온다. 그 결과 우리는 소비를 통해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비는 멈추지 않고 영원히 계속된다. 소비가 무한하게 생겨나고 변화하는 관념과 기호의 소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러한 소비로는 지루함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관념과 기호에 대한 소비는 지루함을 재생산한다. 그러한 소비로는 무언가 변화했다는 느낌만을 갖게 할 뿐, 사실 그 어떤 것도 실질적으로는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성급 호텔에서 며칠을 살고 오든, 우리가 사는 집은 여전히 허물어져가는 담벼락에 위태롭게 기대고 있다. 그 분명한 사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우리는 빚을 져가면서까지 호텔에서 계속 살고 싶어 한다.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소비는 결코 지루함의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단지 문제가 해결된 것 같은 기분만 낼 수 있게 해줄 뿐이다.     


 따라서 고이치로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하이데거를 경유해 지루함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하이데거는 철학은 항상 어떤 기분 속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면서, 인간에게 철학을 시작하도록 만드는 근본기분에 대해 분석해왔다. 『존재와 시간』에서는 불안이라는 근본기분을 분석했다면,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에서는 지루함, 즉 권태에 대해 분석한다. 거기서 하이데거는 지루함을 제1형식, 제2형식, 제3형식의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단순히 병렬식으로 나열된 구분이 아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지루함에 대한 분석이 제1형식에서 제3형식으로 진행될수록 보다 더 깊고 근본적인 차원의 지루함과 마주치게 된다.     


 하이데거는 지루함의 제1형식을 ‘어떤 것에 의해 지루해짐’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지루함에서 우리는 우리 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의해 지루해지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문자 그대로 그 지루한 것에 의해 꽉 붙잡혀 있다.”(363쪽) 하이데거는 역에서 오랫동안 다음 열차를 기다리는 상황을 예시로 든다. 그 경우 우리는 오지 않는 열차를 기다리며 시간에 붙잡혀 있다. 그때 우리의 체감 상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간다. 그로 인해 우리는 지루해한다. 열차가 빨리 와서 타고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열망이 해결되지 않으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어 그저 역에서 기다리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기분전환을 시도한다. 시간표나 노선도 읽기, 바닥에 그림 그리기, 기찻길을 왕복하기 등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다양한 행위들을 통해 어떻게든 남는 시간을 빨리 지나가게끔 노력한다. 즉, 제1형식의 지루함 속에서 우리는 “기분 전환을 행하는 동시에 우리는 스스로를 바쁜 일로 끌어가려고 애쓴다.”(364쪽) 바쁜 일의 종류가 무엇인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어떤 식으로든 시간에 붙잡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그래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도록 정신을 돌릴 수 있는 것이면 된다. 그러므로 “지루함을 떨쳐내려는 상황에서 관심은 오로지 ‘해야 할 무언가’를 찾는 것이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다.” (193쪽)  


 반면 지루함의 제2형식은 어떤 것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처하여, 그 곁에서 지루해함’을 의미한다. 지루함의 제2형식에서 우리는 우리를 지루하게 하는 특정한 무엇인가를 찾을 수 없다. “무언가에 처해서 어떤 장소에서, 저도 모르게, 왜인지, 언제인지도 모르게 지루해”(198쪽)지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파티에서 느끼는 지루함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지루함을 느끼고, 기분전환을 위해 파티에 참석한다. 파티 자체는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류, 맛있는 술과 음식, 좋은 음악 등이 어우러져있다. 그런데 즐거운 파티의 한가운데서 의미 없는 하품을 하거나 담배를 피던 중 문득 지루함이 밀려올 때가 있다. 또는 파티가 즐겁게 끝난 후 집에 돌아가자마자 파티가 무척 지루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우리는 파티를 즐기고 있었으면서도 지루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루함의 제2형식은 바로 이런 종류의 지루함이다.      


 이런 지루함에서는 제1형식의 지루함을 떨쳐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했던 종류의 기분전환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기분 전환 비슷한 행위’들은 존재했다. 화장실을 가거나 담배를 피기 위해 잠깐 자리를 이동한다든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행위들이 바로 그렇다. 그런데 이는 의식적으로 행해진 것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행위들은 그 자체만으로 기분전환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나의 “행동 전체, 더 나아가 그날 파티 자체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기분 전환”(203쪽)이었기 때문이다. 제2형식에서는 기분전환과 지루함이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뒤섞여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루함과 기분전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없었고, 그 원인과 대상 역시 분명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요컨대 제2형식에서는 우리가 놓여 있는 상황 자체가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자 동시에 지루함을 낳는다.     


 지루함의 제1형식과 제2형식은 어떤 방식으로든 지루함의 원인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분전환과 같은 것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고찰하는 지루함의 마지막 제3형식은 그러한 모든 시도가 작동할 수 없는 형태의 지루함이다. 그것은 “‘아무튼 그냥 지루해(Es ist einem langweilig)’라고 말하는 경우, 혹은 좀 더 적절하게 ‘아무튼 그냥 지루해’라는 상황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스스로가 그 상황을 잘 알고 있을 때”(366쪽) 느끼는 지루함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거리를 걷는 중 문득 느끼는 지루함을 예로 든 것처럼 그것은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기분이다. “‘아무튼 그냥 지루해’라는 상황은 전혀 예기치 않게, 그리고 우리들이 그 상황을 전혀 기대하고 있지 않을 때 찾아올 수 있다.”(366쪽) 그러므로 우리는 지루함의 제3형식에 있어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아무런 이유 없이, 우연히 우리의 일상을 뚫고 올라오는 지루함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유 없는 우연한 지루함을 해결할 방법 또한 알 수 없다. 제1형식에서는 나의 시간 리듬에 맞춰주지 않는 시간의 흐름에 잡혀 있는 것이 원인이었고, 제2형식에서는 지루함을 해소하기 위해 만든 기분전환 그 자체가 지루함을 낳았다. 그렇기에 전자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자신이 시간을 죽이기 위해 무언가 할 일을 만들어내고, 후자의 경우에는 비록 지루함과 얽혀있는 방식으로라도 기분전환을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3형식에 이르러서는 어떠한 기분전환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런 지루함 앞에서 무력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황을 지루함에 “귀를 기울이도록 강요되어 있다”(367쪽)고 표현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태를 결코 부정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는 허무에 빠져버릴 수 있는 상태에서 오히려 인간의 절대적인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루함의 제3형식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기분전환이 불가능하다. 이는 다시 말해 인간은 자기 밖의 어떤 것들을 통해서도 그러한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차 시간표도, 담배도 아무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능성을 스스로에게서 찾도록 자기 자신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기분전환을 위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하이데거의 표현에 따르면 ‘온전한 광역’에 놓이게 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 광역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때조차도 그것을 알고 있는 나는 존재한다. 바로 여기서 나라는 존재의 근본적인 뿌리인 현존재,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부정한 뒤에도 남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지루하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지루함의 제3형식에서 나는 “현존재를 현존재로서, 하나의 그 자체로서 근원적으로 가능케 해주는 곳으로 강제적으로 밀쳐져 있음”(367쪽)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현존재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데카르트가 생각하는 나의 존재를 확립한 이후 곧바로 신의 현존을 증명하고자 했다면, 하이데거를 따라 현존재의 존재를 확립한 우리는 어떤 신(현존재로서 우리의 활동의 대상이자 목적)을 찾아나가야 할 것인가? 하이데거가 찾은 신은 나의 밖에 존재하는 신이 아니다. 온전한 광역에는 나 외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찾아야 할 신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와 단호히 결별한다. 데카르트는 인간 존재란 불완전할 수밖에 없기에 인간 밖의 완전한 존재를 찾고자 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인간의 불완전함에서 오히려 완전함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의 신적 능력을 발견했다. 나의 밖에 존재해 나에게 존재와 실천의 근거를 부여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리고 오직 나만이 나 스스로에게 존재와 실천의 근거를 부여할 수 있다. 나 스스로만이 내가 처한 이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권능을 가진다. 하이데거는 바로 이러한 나의 힘과 가능성을 ‘자유’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를 발휘하기로 ‘결단’함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지루함의 제3형식에서 벗어나 의미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나 고이치로는 하이데거가 인간의 자유와 결단을 부르짖는 바로 그 지점에서 수상한 피비린내를 맡는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했던 역사적 과오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의 해방을 향한 결단의 한 역사적 결과이다. 고이치로는 어떻게 하이데거의 사유가 실제의 역사에서처럼 비극적인 결말로 질주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이데거에게서 결단은 아무런 근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단적으로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광역에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 그러한 결단에 필요한 내적 이유를 갖지 않는다. 결단은 단지 결단하겠다는 의지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오히려 결단에 나 외의 것들이 결부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결단이 아닌 부자유한 결정일 뿐이다. 지루함의 제1형식과 제2형식은 바로 그러한 이유로 인해 하이데거의 비판의 대상이다. 거기서 나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 외의 다른 무언가에 의존한다. 그러나 지루함의 제3형식에서 발생하는 결단은 오로지 나 자신에 의해서 내려진다. 따라서 결단하기 위해서 인간은 나 외의 모든 것들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 실제의 삶에는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다른 것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결단하기 위해 그런 모든 것들이 나의 결단에 영향을 끼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나의 결단에만 복종해야 한다. 고이치로는 여기서 광신적 테러리스트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는 사물이나 사람과의 우연한 교류가 존재한다. … 그렇지만 결단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그러한 기회가 실제로 눈앞에 있는데도 일부러 교류의 기회를 거부할지도 모른다. … 오로지 결단만을 바라는 사람은 스스로 그러한 관계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272쪽)

   

 따라서 고이치로는 하이데거처럼 결단을 인간 존재의 지상목표로 설정하는 순간, 오히려 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바로 결단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단의 필요성, 즉 ‘광기’의 필요성을 처음부터 정해버리면 … 처음부터 결단이라는 광기를 추구하여 눈을 감고 귀를 닫은 채 주위의 상황에서 일부러 멀리 떨어지는 사태가 생긴다. 주변의 여러 가지 배려나 관심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떨어뜨려놓고 오로지 결단이 명령하는 데 따라 행동하는 태도는 결단이라는 ‘광기’의 노예가 되어버리는 셈이다.”(272~273쪽) 이제 지루함의 제1형식과 제3형식의 구분은 모호해진다. 제1형식 역시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를 하기로 결단했다는 점에서는 제3형식과 그 근본적인 구조에서 별다른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지루한 현재의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것에 몰입하는 삶, 이는 결국 그것의 노예가 되는 삶에 다름 아니다. 오히려 제3형식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더 위험할 수도 있다. 적어도 제1형식에서는 타자와의 관계 자체를 끊어버리지는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이치로는 제1형식과 제3형식 모두를 거부하고 제2형식에서 맹목적이지 않은 새로운 해방의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지루함의 제2형식은 제1형식에 비해 “현존재의 훨씬 더 큰 균정(Ausgeglichenheit)과 안정(Sicherheit)이 있는 것”(366쪽)이라고 말한다. 제1형식에서 인간은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강박에 쫓겨있다. 무엇이든 시간을 죽이고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기분전환이라면 닥치는 대로 수행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에 반해 제2형식에서 인간은 그런 강박에 쫓기지 않는다. 파티에 참석해 시간을 보내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지루함을 생각할 여유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제2형식에서 인간은 자신의 현존재를 생각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정과 ‘제대로 된 정신’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하이데거는 이러한 안정이 자포자기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즉 그것은 현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안정이 아니라 지루함과 기분전환이 뒤섞인 파티와 같은 상황 속에 그저 묻어가려는 것에서 나오는 안정이다. 파티가 끝난 후 지루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 없지”라고 하며 잠자리에 들고 다시 일어나 새로운 파티에 참석해 지루함과 기분전환이 얽혀있는 상황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그러한 태도로는 지루함에서 벗어날 수 없을뿐더러, “아무튼 그냥 지루해”라는 보다 근본적인 지루함이 튀어나올 때마다 자신의 현존재를 자각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체념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고이치로는 제3형식과 제1형식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지적하면서, “제2형식이야말로 지루함과 분리될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279쪽)라고 말한다. 인간은 지루함 속을 살아가면서 기분전환을 추구하지만 그러한 기분전환 또한 지루함과 이내 뒤섞이고 만다. 그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튼 그냥 지루해”라는 생각이 언제든지 튀어 올라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심심풀이 놀이에 의해서건 결단에 의해서건 어떤 것의 노예가 됨으로써 그러한 지루함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위험하다.     


 따라서 고이치로는 제2형식에서 발생하는 기분전환에 보다 충실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기분전환의 순간을 온전하게 즐기는 것이다. 아무리 맛있는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한들 잠깐의 기분전환에 그칠 것이며, 결국 다시 지루한 일상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스테이크를 먹는 기분전환의 순간에 얼마나 충실했는가는 분명 지루한 일상에 색다른 흔적을 남긴다. 오감을 통해 요리를 충분히 즐기면서, 동시에 스테이크가 식탁 위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곱씹어보며 음식과 요리에서부터 정치와 환경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로 뻗어나가는 것은, 단순히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다.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것 역시 이런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물론 기분전환을 충분히 즐기더라도 결국 지루한 일상의 상태로 되돌아올 것이다. 그러나 고이치로는 기분전환을 충분히 즐기는 것을 통해 제1형식과 제3형식의 경우에서처럼 어떤 것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으면서도 지루함과 공존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나아가 고이치로는 제2형식 속에서는 지루한 일상을 깨고 들어오는 새로운 것들의 ‘불법침입’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여유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길을 생각해보자. 길 위에서 마주치는 것들을 구경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내가 통제 가능한 것들을 향하는 것이 아니다. 건물의 철거나 신축, 집회를 여는 사람들, 길바닥에 누워 아파하는 개와 고양이, 교통사고로 통행이 통제된 도로는 내 앞에 펼쳐져 나에게 주어진 것이지 내가 만들거나 그러도록 허가해준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것들의 변화는 나의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에 불법적으로 침입해 들어온다. 그 결과 출근길의 일상은 새로운 변화를 겪도록 강제된다. 왜 어제까지 있었던 가게가 문을 닫았을까? 저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하는 거지? 저 동물들은 어쩌다 길거리에 버려졌을까? 그러나 무언가의 노예가 된 상태에서는 그런 강제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워커홀릭에게 출근길은 단지 일하기 위해 가는 공간상의 이동에 불과하다. 거기에 누가 존재하고 거기서 무엇이 발생하는지는 전혀 관심사가 아니다. 오로지 할 일에만 온 정신이 팔려있기 때문에 불법침입이 발생하기 어렵다. 설령 발생하더라도 그것은 사유의 계기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이동을 방해하는 귀찮은 일이 된다. 어차피 회사에 도착하면 끝날 일이라 하더라도 불법침입의 발생과 그것이 나의 사유와 행동에 가져오는 변화는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작지만 분명한 희망을 보여준다. “철학이란 그렇게 태어난 행동 가운데 하나다.”(307쪽)     


 하이데거가 지루함의 제1형식과 제2형식의 근본적인 동일성을 지적하면서 제3형식을 통해 지루함으로부터의 해방의 가능성을 탐색했다면, 고이치로는 제1형식과 제3형식의 동일성을 비판하면서 제2형식에서 해방의 틈을 열고자 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시도는 성공적일까? 고이치로가 제2형식에 부여한 가능성은 나머지 두 형식의 문제점에서 벗어나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고이치로는 지루함의 제2형식에서 발생하는 기분전환을 충분히 즐기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으로 불법침입하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사유와 행동의 지평을 확장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바로 이런 태도는 어떻게 가능할까? 그렇게 할 것을 ‘결단’함으로써 가능하다.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스테이크를 즐길 것을 결단함으로써 우리는 기분전환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우리의 삶에 불법침입하는 것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일 여유를 가질 것을 결단함으로써 우리는 불법침입해온 것들을 사유하게 될 수 있다. 반드시 우리가 어떤 것의 노예가 될 때에만 그러한 즐김과 사유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떤 것에 붙잡히는 삶을 살지 않더라도 기분전환을 충분히 즐기지 않거나 불법침입하는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그것들이 강제하는 삶의 변화가 싫기 때문일 수도 있고, 단지 그것들을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지루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을 갖지 않고서도 고이치로가 제안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분전환을 충분히 즐기자고, 불법침입하는 것들을 치열하게 사유하자고 ‘결단’해야 한다. 들뢰즈는 주말마다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찾는다. 거기서 그는 기분전환과 함께 자신에게 불법침입해올 것들을 기다린다.(323~324쪽 참조) 그러나 들뢰즈는 몰라도 우리는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가자고 결단해야 한다. 주말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쪼개서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챙겨 입고 집 문밖을 나서야 한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얼마나 큰 결단을 필요로 하는 것인지는 우리 모두가 안다. 고이치로는 즐기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결단하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잘 훈련된 결단은 고이치로의 의심처럼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결단은 아닐 것이다.     


 지루함의 제2형식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분전환과 불법침입에 대한 기다림은 사실상 제1형식과 제3형식에서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결국 지루함의 세 가지 형식은 결국 근본적으로 동일한 형식을 가진다. 셋 모두 지루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이며, 그러한 시도들은 모두 결단을 필요로 한다. 다시 말해,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어떤 방법을 택하든지 다른 방법이 아니라 바로 그 방법을 택하기로 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지루함의 세 형식은 결단의 내용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사실상 동일하다.     


 그러므로 결단을 하느냐 마느냐보다 결단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무엇을 선택하든 결단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면 어떤 결단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해진다. 그것이 나치나 광신적 테러리스트를 향한 결단일 수도 있지만, 철학자나 환경운동가를 향한 결단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단의 내용에 대한 판단이다. 결단의 내용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그리고 그처럼 다양한 결단들 사이의 치열한 투쟁, 이 결단이 옳은 결단이라고, 적어도 더 유용한 결단이라고 주장하는 결단들 사이의 투쟁의 영역이 바로 정치이다. 따라서 지루함에서 벗어나서 어떤 결단을 할 것인가는 개인적 판단이 아니라 공적인 정치의 영역이다. 그것이 스테이크를 먹는 문제라 하더라도 말이다. (이 점에서 고이치로의 사유는 공적인 정치영역이 극도로 폐색된 상태에서 정치 외적인 장소에서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열기 위한 일본적인 사유의 하나가 아닐까? 자유민주당의 헤게모니 독점, 당내 계파들 간의 권력투쟁과 정치귀족들의 가업으로서의 정치가 70년 넘게 지속됨에 따라 일본에서는 제도적 의미의 정치뿐만 아니라 정치적 행위 전반이 정치적인 것을 생성하는 힘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치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아즈마 히로키는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서브컬쳐와 오타쿠를, 『관광객의 철학』에서는 관광과 관광객을 경유해 우편적 다중과 오배(誤配)라는 정치적 주체와 행위를 구상한다.)    


 설령 고이치로의 방법이 성공적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근본적인 물음이 남는다. 도대체 왜 인간은 그토록 지루해하고, 동시에 지루함을 어떻게든지 극복하고자 했는가?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아무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게다가 인간의 존재에는 아무런 필연적 이유도 없다. 인간은 우연하게 태어나 우연히 삶을 살아가다가 필연적으로 죽는다. 인간의 삶은 그만큼 허무하다.     


 인간은 이런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죽음 앞에 평온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삶에 어떤 이유, 필연성, 근거를 찾고 싶어 한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이 삶을 지속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에 삶의 비참과 고난을 견뎌내는가? 그러한 인내에 아무런 보상도 뒤따르지 않고, 단지 죽을 뿐인 존재가 인간인데 말이다. 인간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싶어 한다. 신과 종교를 통해 최소한 죽음 이후에라도 회고적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정당화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열망의 산실이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인간은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의 방법을 모르기에 지루함에 빠진다. 그 어떤 것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기 때문에, 그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체념과 자기혐오 속에서 삶 자체에 지루함, 즉 권태를 느끼는 것이다.     


 고이치로, 나아가 하이데거의 방법은 이러한 지루함의 원인을 해결할 수 없다. 담배를 아무리 맛있게 피워도, 스테이크에서 아무리 많은 즐거움을 느껴도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그러한 사실 앞에 삶의 즐거움이란 무상할 뿐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결단, 또는 다른 어떤 종류의 결단 역시 마찬가지다. 결단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 모든 것은 우연하고도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그것 또한 우연적이고 유한할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얼마 동안이나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잊도록 만들든, 결국 인간은 다시 자신의 운명을 떠올릴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인간은 지루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 과연 인간의 운명은 부정되거나 적어도 회피되어야만 하는 것인가? 인간의 유한성, 인간 존재의 이유 없음, 인간의 우연성, 인간의 죽음은 결코 긍정될 수는 없는가? 우리는 현재 우리가 존재하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긍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고,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未來)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나’를 존재의 이유와 필연성을 부여받을 미래로 끝없이 유예할 때 우리는 대책 없는 낙관주의와 무능력한 허무주의 내지 데카당스 사이에서 끝없이 진자 운동할 뿐이다.     


 그러한 운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종교다. 철학을 비롯한 학문은 현재에 발목잡혀있다. 다시 말해, 학문은 단순히 현재에 발을 딛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진창 속에 단단히 발이 묶여있다. 따라서 학문은 매우 힘겹게 앞으로 나아가다가 자주 뒤로 자빠진다. 그럴 때마다 학문은 쉽게 관념들의 급진적 놀이로 도피하거나 현재에 주저앉아버린다. 공상적 유토피아주의가 전자의 한 사례라면, 실증주의는 후자의 전형적인 결과다.     


 반면에 종교는 태생적으로 실증주의를 거부한다. 종교는 현재에 발 딛고 서 있지만, 현재에 의해 구속받지 않는다. 종교는 관념의 유희로 빠지지도, 현재에 만족하지도 않는다. 종교는 언제나 지금 여기 이 땅위에 자신의 관념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그러한 실천은 믿음에 의해서 가능하다. 믿음은 학문적 논증이 거의 제공하기 어려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이다. 제아무리 현재로부터 나아가려는 시도가 실패하더라도 종교적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실천을 반복할 힘을 준다. 종교적 순교자들이 학문적 순교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존재하는 이유다.     


 물론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종교는 기성종교가 아니다. 기성종교는 영혼의 불사를 통한 영생, 육체의 부활, 전지전능하고 권선징악을 행하는 신의 존재 등을 통해 인간의 삶에 목적과 이유, 즉 필연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거짓이다. 그것들은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기를 거부하고 비참과 고난으로 가득 찬 자신의 삶에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기성종교의 옹호자들은 이에 반대할 것이다. 여기서 그 교리를 둘러싼 방대한 신학적 논쟁을 반복할 수는 없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기성종교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으며, 한국의 경우 무종교인의 비율이 50% 내외에 달한다는 사실은, 교리의 진리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기성종교의 교리에 대한 믿음이 더 이상 인간이 변화를 위해 투신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이유에서라도 우리에게는 다른 종교가 필요하다. 그 종교는 인간의 운명적 조건들을 은폐하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조건들을 모두 긍정한다. 그 종교는 인간의 유한성, 인간 존재의 이유 없음, 요컨대 인간의 우연성이라는 그러한 조건에서부터 자신의 교리를 전개한다. 따라서 그것은 우연성의 종교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의 우연성을 긍정한다고 해서 인간의 운명을 완벽하게 이해(理解)하거나 그것에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우연성을 거부하고 어떻게든 필연성을 부여하려는 무상한 노력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미래에 도래할 ‘나’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유한한 현재의 우리 자신을 진정한 나로서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붓다는 일체개공(一體皆空), 즉 모든 것은 본질적인 이유로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따라서 본질상 비어 있는 것이며,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모든 것은 고정되거나 영원불변한 필연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연적인 작용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연성의 종교는 이처럼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는 운명을 긍정하지만 그렇다고 허무주의나 데카당스로 빠져버리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연성의 종교는 인간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 역시 믿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재에 어떠한 필연성도 있지 않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인간에게 필연성을 가장하여 자신을 강제하려는 어떤 것도 그 정당성을 가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인간을 구속할 수 있는 어떠한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필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칙은 모든 예외를 포섭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필연성은 모든 우연성을 자신의 체계 내로 가져올 수 없다.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법칙은 언제든 예외가 있을 수 있다는 법칙뿐이다. 마찬가지로 유일한 필연성은 오직 우연성만이 존재한다는 필연성뿐이다.     


 그러나 이는 증명될 수 없는 필연성이다. 왜냐하면 오직 우연성만이 존재하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믿음을 요구하는 필연성이다. 그리고 믿음에 따른 실천을 통해서 입증되어야 하는 필연성이다. 이는 과학에서 가설을 통한 입증의 방법과 유사하다. 일단 참이라 믿고 그에 따라 실천한 결과로서 그 가설의 참임이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실천하는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오직 우리 자신만이 자신에게 부과되는 필연성을 의심하고, 우연성을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오직 우리 자신만이 우연성만이 필연적이라는 필연성을 성립시킬 수 있다. 따라서 우연성의 종교에서 필연성을 창조하는 주체인 신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연성의 종교에서 신인 우리 자신은 우리 자신인 신을 믿는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에 따라 세상을 창조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참임을 입증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우연성의 승리는 극히 드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믿음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연성의 종교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왔다. (마태 10: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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