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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이 Oct 02. 2020

진실은 악일지라도 선한가?

김은국『순교자』

 어느 땐가 한 술자리에서 문득 모든 것은 사실 동어반복(tautology)이 아닌가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다양한 믿음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나의 감각에 대한 믿음에서부터 때로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 전체는 이런 믿음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백지상태에서 탐구를 통해서 정당화된 믿음들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어떤 믿음을 가지고 그 이후에 그것을 정당화한다. 바늘에 찔렸기 때문에 아픔을 가진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프다는 것을 믿고 그 이후에 바늘에 찔렸기 때문이라는 인과를 성립시키는 것이다. (이는 시간적, 물리적 선후관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믿음에 대한 논리적 선후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요컨대 믿기 때문에 믿는 것이지 믿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믿는 것이 아니다.


 그 후로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던 이 말이 갑자기 떠오른 건 순전히 이 책을 읽어나가는 모든 순간 동안 나를 덮쳐오던 질문들 때문이었다.


진실(진리/사실)은 반드시 말해져야 하는가.

그 진실이 인간의 존재, 인간의 삶, 인간의 죽음이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래서 당신의 비참과 고통과 죽음은 어떤 의미도 없다는 진실일지라도 그러한가. 

그 진실을 누구도 듣기를 원하지 않을지라도 그러한가.

그 진실을 가리고 외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동화, 도래할 미래에 대한 낙관이라는 헛된 희망을 가져야 하는가.

그래서 신은, 종교는 필요한 것인가.

인간에게 무심하고 그래서 허무한 진실을 고독하게 품고 삶을 방치하는 것과, 한낱 동화이자 헛된 희망에 불과할지언정 그것을 붙잡고 삶을 견뎌내는 것 사이의 양자택일밖에는 존재하지 않는가.


 이 질문들에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다만 하나의 거친 스케치로 대신하고자 한다. 진실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해져야 한다고, 진실을 가리려는 어떤 것도 거짓된 것으로서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것은 진실이 치뤄야 할 대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넨 그들의 아픔과 절망을 이만큼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머리로, 지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거야. 단순한 동정적 관찰자의 입장에서 말야.

 어디선가 철학자연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 말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그에 동의하면서 그런 철학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진실은 반드시 말해져야 하고 따라서 모두에게 알려져야 한다는 믿음 역시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그러한 진실이 지금은 알려지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나는 그 진실을 알고 있지만 너는 모르고 있다는 믿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 믿음 속에서 나는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가 4:23)고 진실을 말할 입을 가지고 있지만, 너는 기껏해야 진실을 들을 귀만 가질 뿐 말할 수 있는 입은 없는 존재이다. 앎과 무지, 말할 수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불평등은 평등에 대한 신념 속에서 슬그머니 재생산되고 있었다.

젊은 친구, 그들이 진실을 원치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소?

 진실은 알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에 누구나 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육신의 죽음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삶의 비참과 고통은 그저 비참과 고통일 뿐 어떤 숭고한 의미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그러한 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이다. 진실을 마주할 때, 우리는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가야 할 이유조차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 때때로 주는 작은 행복한 순간들이 그러한 진실을 잊게 해줄망정 단지 그때뿐이다.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의미없음은 다시 우리를 덮쳐온다. 그것이 싫기에 인간은 신을 만들고, 종교를 만든다. 어떻게든 삶과 고통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지금의 삶을 견뎌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서.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는 맑스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인민이 무지하거나 허위의식에 차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인민 스스로가 아편이 없으면 도대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편에 의지해서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것이 종교든 다른 무엇이든.

동화도 우리 생활의 전체 가운데 일부일 수 있다고 생각지 않나? 그렇게 되면 그건 더 이상 동화는 아니지. 현실이 되니까. 진짜로 의미 있는 그 어떤 것이 된단 말야. … 그 교인들은 이 무의미한 세계에서 그들의 생을 지속시키는 그 무언가를 갖고 있어. 한데 우리에겐 그게 없지. 그들이 가진 그것을 우리가 꼭 동화라고 불러야 할 게 뭐야?

 동화가 필요하다는 이들을 손쉽게 비난하고 경멸하기는 어렵다. 이들은 바로 그 동화를 믿고 싶어 하는 이들 곁을 지키고자 했다. 제발로 ‘빨갱이’들이 밀려 내려오는 평양을 떠나고자 하지 않았다. 동화를 믿는 대중의 옆에서 진실을 홀로 짊어 메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은 그렇게 간단하게 대중을 미혹하는 환상의 장사꾼이라고 불릴 수 없다. 그들은 “절망이 어떻게 사람들의 정신을 마비시키고 그들을 삶의 어둔 감옥으로 던져 넣고 있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그래서 “인간이 희망을 잃을 때 어떻게 동물이 되는지, 약속을 잃었을 때 어떻게 야만이 되는지”를 직접 목격했다. 그들은 그런 인간을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유한한 인간이 끝없는 절망의 나락 속에서 헤메지 않기 위해 동화를 말한 것이다. 

될수록 많은 이들이 절망의 노예가 되지 않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서 이 세상의 고난을 이겨내고, 될수록 많은 이들이 평화와 믿음과 축복의 환상 속에서 눈을 감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 그게 내 희망이오.

 그들은 인간을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하기에 절망을 헤쳐나갈 수 없는 그들을 “동정해줄 용기”를 갖고 있다.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그래서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거짓 동화를 말할 수 있는 그들과 달리 대중은 그럴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희망 없이는, 그리고 정의에 대한 약속 없이는 인간은 고난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 희망과 약속을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면(하긴 이게 사실이지만) 다른 데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래요, 하늘나라 하나님의 왕국에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그들은 대중이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진실은 이미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대중은 진실을 마주하기를 회피하고 싶어한다. 거짓된 것일망정 누군가에게 위로와 희망을,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고 싶어한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죽음이 자신의 눈앞에 닥쳐 있음을 알면서도 대중에게 동화를 이야기해주어야 한다.

나는 그들 곁에 있어야 합니다. 아무도 그래 줄 사람이 없다면 나만이라도 남아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고 있고 나도 그들을 돌보고 있다고 믿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나는 이들과 같이할 수 없다. 그것은 진실이 진실이기 때문에 끝내 말해져야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의 불평등을, 그것도 지독하리만치 인간적인 사랑이 넘치는 불평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목자(牧者)들은 “나도 그들 중의 하나”라고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직 목자들만이 진실이라는 십자가를 질 수 있다. 오직 목자들만이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보고 진실이 주는 허무와 고독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많은 이들이 다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건 아니잖소? … 그들은 십자가를 질 수 없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사람들이오. 우린 그들에게 그들의 그리스도와 그들의 유다를 주어야 합니다.

 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대중의 무능력! 바로 그 무능력이, 그로부터 나오는 목자와 대중의 불평등이, 나로 하여금 그들의 위대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할 수 없게끔 만든다.

성 중에서는 죽어가는 자들이 신음하여 다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12)

 목자들 또한 여기서 머뭇거렸으리라.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 따위에는 무관심하다. 아니 애초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목자들은 거짓을 말하고 동화를 들려준다. 그렇기에 그들은 욥기를 마저 읽어내려간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어야 했다. 대중의 무능력을 믿을 것이 아니라 “나도 그들 중의 하나”라고 더 굳게 믿었어야 했다. 불평등이 아니라 평등을 믿었어야 했다. 한낱 인간에 불과한 목자들이 진실을 알고 진실을 마주보고 진실을 짊어 메고 갈 수 있다면, 역시 한낱 인간에 불과한 대중도 그럴 수 있으리라 믿었어야 했다. 심지어는 목자들 중에서도 어떤 이들은 십자가의 길을 걷지 못하고 무너져버렸다면, 대중이 그러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일까. 진실은 모두가 알고 있다. 문제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다. 작은 시골마을 나사렛에 사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가 그 길을 걸어나갔다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실패하고 좌절하고 심지어 누군가를 죽게 만들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평등을 믿는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당신과 나는 평등하다고 믿는다. 세상의 모든 실증주의의 결과들이 불평등을 가리키고 있을지라도 나는 평등을 믿는다. 왜냐하면 나는 평등을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나는 평등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입은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도 입이 있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발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당신이 진실을 말하도록, 그래서 진실을 견뎌내도록 할 것이다. 그것은 진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알고 있는 진실을 자백할 수밖에 없게끔 실천할 뿐이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평등을 입증할 것이다. 말할 입 있는 자는 말하라, 걸을 발 있는 자는 걸어라.


 동화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희망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무의미함, 삶 자체의 부조리함이다. 그러한 진실만으로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동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동화여서는 안 된다. 오히려 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난 이후에, 오로지 그러고 난 이후에만 우리가 스스로 써내려가는 동화여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나 내세에 대한 희망으로 채워져 있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한 비참과 고통 속에서 써지기 때문이다. 그 동화의 내용이 어떨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예측해볼 수는 있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제(聖諸)이다. 마땅히 알라. … 통틀어 말한다면 이 인생은 바로 고 그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존재하지 않는 인생의 고통에 대한 직시는 그러므로 열반(nirvana)으로 붓다를 이끈다. 그러나 열반은 내세의 구원에 대한 약속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붓다 역시 목자들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붓다에게 열반은 차라리 지금 이 곳에서 끝없이 실천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덕이시여, 그러면 그 해탈한 사람은 어디에 가서 태어나는 것입니까?”
“바차여, 그것은 어디에 가서 태어난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은 여기 이 무의미한 비참과 고통이 가득한 곳에서 여전히 살아간다. 열반은 바로 이 곳에서 이루어지는 실천이다. 그것은 “훨훨 타오르던 불도 그 땔감이 다하고 나면 꺼져 버리는 것”과 같이 인간의 고통과 번뇌를 만들어내는 불꽃의 땔감을 없애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실천에는 내면적 수행도 있겠지만 동시에 외적 환경의 변화 역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열반이라는 실천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진실은 악일지라도 선한가? 『순교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딜레마이다. 진실의 내용이 악이기에 그것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진실은 진실이기 때문에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말해져야 한다면 우리는 절망과 고독의 나락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둘 모두를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야 한다. 진실은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라고. 그것은 선과 악 이전에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 그 후에 우리는 열반이라는 실천을 통해 스스로 동화를 써내려가야 한다. 희망의 등불은 다른 어디에서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 

너희는 이에 자기를 섬으로 삼고 자기를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며, 또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남을 의지처로 하지 말라.

 바로 이 길만이 우리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벗이여, 이것은 선한 길이다. 벗이여, 노력할 만한 값어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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