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스타인 베블런(Thorstein Veblen)
인간의 역사는 기술발전의 역사라고 할 수도 있다. 인간은 엄청난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는 자연의 힘에 맞서 과학과 기술을 동원해 자연에 적응하고 자연을 통제하고자 했다. 새로운 기술의 발명은 언제나 이번에야말로 드디어 인간을 구속해온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과 열광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근대의 산업혁명 이후 수백 년 간 폭발적으로 성장해온 인류의 문명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 속에서도 그런 희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며, 그 성취를 향해 한 걸음씩 진보해왔음을 웅변하는 듯하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방식을 기술구원론이라고 부른다면, AI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구원론을 넘어 인간이 인간을 초월해 기술 자체와 결합한 트랜스휴먼으로서 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도 있다는 꿈을 심어주고 있다.
소스타인 베블런 역시 이러한 기술구원론의 신봉자이다. 베블런은 인류의 역사를 진화와 진보의 역사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진보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기술의 발명과 사용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물론 베블런은 자신의 진화론이 헤겔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이 절대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방향성도, 최종 목적도 정해져 있지 않은 그저 기술진보의 누적적 인과관계라고 말하지만, 기술구원론적 진화론에는 이미 인류의 방향성과 목적이 내재되어있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기술의 힘으로 자연에 종속된 억압의 쇠사슬을 끊고,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될 것이다.
기술은 물질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 베블런은 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정신세계와 사회 공동체에 있어서도 진정한 진보와 해방을 가져오리라고 보았다. 그에게 인간의 사유와 지식체계는 언제나 기술과 기술에 기반한 생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의 기술은 그러한 기술을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와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예컨대 현대의 대규모 기계 산업은 정밀하게 분해되고 계산되는 합리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산업의 발달과 함께 그러한 합리성은 보다 촉진되고 보편화된다. 따라서 베블런은 현대사회에 걸맞은 정신과 학문은 목적-수단의 정교한 비인간적, 물질적인 인과관계를 추적하는 합리성에 기초하는 것이며, 이러한 합리성을 체화한 인간들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나아가 기술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기술에 적합하고 기술의 발전을 장려하는 일련의 사회적 제도들을 낳는다. 베블런은 인간 진보의 역사는 이러한 기술-제도 복합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연도태의 역사라고 말한다. 낡은 기술-제도는 새로운 기술-제도보다 자연에 적응하고 자연을 극복하는 데 무능하게 되어 점점 도태된다. 이전에 새로운 기술-제도였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더 첨단의 기술-제도에 의해 대체된다. 인간의 역사는 이처럼 새로운 기술-제도가 낡은 기술-제도를 대체해온 역사인 것이다.
물론 베블런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자동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낳고, 낡은 기술-제도를 자동적으로 대체하는 것은 아님을 인정한다. 새로운 기술은 기존 제도와 그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과 갈등을 빚는다. 따라서 기술 발전이 인류의 매끄러운 선형적 진보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베블런은 기존 제도가 새로운 기술보다 우월한 결과를 낳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기술과 그 기술의 신봉자들에 의해 붕괴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계급모순을 역사의 추동력이라고 보았다면, 베블런에게 계급모순은 새로운 기술과 기존의 제도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모순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베블런의 사유는 그의 시대적 한계에서 비롯된 몇몇 세부적인 것들을 제외하면, 기술구원론의 전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인류를 한 단계 높은 단계로 도약시켜줄 것이라는 기술구원론은 인간에게서 주체의 역할을 박탈하는 것 같지도 않다. 새로운 기술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복리를 증진시키고자 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 보다 자유롭게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술구원론은 결코 자신의 예언을 실현할 수 없다.
첫째, 베블런이 사망한 이후 대략 한 세기가 지난 현재의 우리는 기술이 구원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목도하고 있다.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인간은 이전에 비해 발전된 생활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은 기술 발전 때문에 기후변화에 시달리고 있다. 오존층의 파괴와 미세먼지는 이제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지구 온난화로 시베리아 영구 동토층이 녹아내리면서 그곳에 얼어붙어있던 고대 바이러스들이 부활해 면역이 없는 인류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라는 주장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많은 과학자들이 일관되게 경고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역성장이라는 것이다. 당장 탄소배출을 획기적인 수준으로 절감해야 지구의 평균 온도 상승을 억제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전 지구적 경제 규모가 축소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은 기술이 낳은 부작용은 기술로 극복할 수 있다는 반박에 부딪힌다. 코로나19가 기술과 인류의 발전이 낳은 부작용이지만, 동시에 mRNA 백신 역시 인류가 만들어낸 최첨단 생명공학기술의 산물이다. 백신의 개발은 엄청난 규모의 자본과 시설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인류의 발전에 필연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둘째, 기술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판단을 할 수가 없다. 기술이 구원을 가져올지, 재앙을 가져올지는 오로지 그 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의 가치판단에 달려있다. 근대 이후 전쟁의 양상은 그 이전과 비교해볼 때 매우 달라졌다. 기술은 보다 넓은 지역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살상도구를 인간에게 제공했다. 아우슈비츠의 가스실과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은 기술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기술은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항해하는 꿈을 가지게 해주었고, 병과 늙음을 극복하고 심지어 죽음마저 초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수많은 인간들의 지구에서의 삶을 절멸시켰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기술 발전의 혜택을 그 기술의 사용에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국한시키고 있다. 실제로 거대 제약회사들은 인간에게 시급히 필요한 약을 개발하는 것보다 돈이 되는 약을 개발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따라서 기술이 자동적으로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스스로를 구원하는 방향으로 사용할 때에만 비로소 구원이 가능하다. 기술구원론은 이런 비판을 전부 부정할 수는 없지만, ‘기술이 인간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된다면’이라는 조건 하에 자신을 계속 주장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과연 새로운 기술은 ‘좋은 것’인가? 그것이 좋은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좋다는 것인가? 이러한 비판은 특히 장애와 기술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좋은 것이라고 판단된다면, 그것은 그 기술이 장애인이 더 이상 장애인으로서 살아가지 않고 비장애인 또는 정상인처럼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이 암묵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우열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다. 장애인과 장애인의 세계는 정상적이지 않고 하루빨리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장애인이 비장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기술이라면, 장애는 ‘좋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지극히 우생학적인 사고방식이다. 요컨대 기술구원론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은 얼핏 중립적이고 건조한 역사기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담론 자체가 다양한 기술-제도들을 줄 세우고, 다양한 인간 존재들의 위계를 정립하는 일종의 우생학이다. 인간이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생학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른 것보다 더 우월한 것도 더 열등한 것도 아닌, 그 존재 자체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표상으로서 존중받는 기초 위에서 다양한 기술-제도들이 동등하게 논의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