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생각 에너지
1998년 여름,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를 방문한 Softbank 손정의 회장과 Microsoft 빌 게이츠 회장에게 IMF 외환위기를 겪고 있는 대한민국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했다. 두 사람의 대답은 같았다.
“첫째도 브로드밴드, 둘째도 브로드밴드, 셋째도 브로드밴드”
다음해인 1999년 대한민국은 초고속 인터넷 망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금 대한민국은 콘텐츠에서도 속도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브로드밴드를 갖춘 나라가 되었다.
당시 사업구상 중이던 필자는 초고속 인터넷 망 확대를 지켜보면서 사업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답은 <전자상거래>였다. 곧 온라인 시장이 오프라인 시장을 압도할 것이고, 온라인 상품을 전달하는 택배는 엄청난 성장을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친구를 만나 필자가 지금까지 고민한 내용을 이야기를 했다. 인터넷 비즈니스와 미래, 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친구는 소주 한 모금을 입에 탁 털어 넣더니 이렇게 말했다.
“오케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충분히 이해했어. 그런데 말이야. 한가지 궁금한 점이 있어. 정말 오프라인 매장들이 모두 사라지고 온라인 매장만 남을까? 오프라인 매장도 뭔가 살아남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 친구의 말이 맞았다. 오프라인 매장은 줄어들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도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약 40만년 전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가 등장했다. 호모사피엔스의 등장부터 지금까지 기간을 100으로 놓고 본다면, 인류가 온라인을 사용한 것은 전체 기간의 1%도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인류의 유전자와 습관에는 99%의 기간 동안 쌓아온 본능, 특히 원시시대 생존본능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영국 지리학자 제이 애플턴이 주장한 <조망-피신 이론>이다. 숨어서 살펴보고 도망치거나 사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시시대 생존방식이 지금도 우리 본능에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페를 가면 구석진 창가에 앉아 창 밖을 관찰하려고 하는 것이다. 버스에서 창가에 앉으려고 하고, 지하철에서 양쪽 끝 좌석에 앉으려는 것도 같은 이치다.
1%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얻은 온라인 경험이, 99% 기간 동안 쌓아온 생존본능을 억누르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할지언정, 원시시대 생존본능이 이끄는 대로 만나서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 매장은 언택트 시대가 와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클라우드 펀딩을 좋아한다. 독특하고 참신한 제품을 찾을 수 있어 자주 참여하는 편이다. 오래 전 필자의 눈길을 끈 제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여행지도였다. 지금은 국내 여행지도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이 여행지도는 큰 전국지도 한 장에 지역별로 추천하는 여행지가 그림과 함께 표시되어 있다.
물론 모바일 지도가 훨씬 더 편리하다. 확대/축소, 블로그 연결뿐 아니라 SNS를 통해 가족와 친구에게 링크를 보내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이 여행지도가 클라우드 펀딩에서 대박을 친 것일까? 온라인 경험이 어쩌지 못하는 <조망-피신 이론> 때문일지도 모른다. 전국 모든 여행지를 한 눈에 아우를 수 있고, 여행 동선을 계획하기에도 편리하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손에 지도를 쥐면 이 지도의 땅이 내 것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그 외에도 종이지도에 대한 향수 또는 레트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변화에 빠르게 따라가는 사람은 살아남고 따라가지 못하면 죽는다고 강요받는 시대다. 그러나 변화에 정신없이 따라가면 소용돌이에 휘말려 나를 잃고 만다. 오히려 한 걸음 떨어져 깊이 생각하고 넓게 바라보는 사람은 변화에 휘말리지 않고 다른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만약 20년 전에 오프라인 매장이 다 사라질 것이라고 착각했던 내가 생각의 폭을 넓혔다면 어땠을까? 무척 궁금해진다.
글ㅣ정천(靜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