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시작한 게 있었다. 바로 걷기.
대단한 계획은 아니었다.
걷는다고 해서 땀이 나거나 숨이 찰 것도 없고, 그저 바람 쐬며 천천히 걷다 보면 몸도 마음도 조금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서울은 아니지만, 우리 동네엔 의외로 괜찮은 하천이 하나 있었는데 그걸 따라 자전거 도로와 산책길도 꽤 잘 돼 있었다.
새벽 공기가 좋을 땐 엄마와 함께, 밤바람이 좋은 날엔 나 혼자 걷고 돌아오곤 했다.
의외로 걷는다는 건 심심하지 않다.
생각도 정리되고, 뭔가 해냈다는 기분도 들고.
그러던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앞으로 가방을 둘러멘 여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작은 발걸음으로 조용히—but 빠르게—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그냥,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운동하러 나왔구나.
출근길에 멘 가방이 덜렁거리는 게 싫어서 앞으로 돌려맨 거겠지. 나도 해봤다. 불편하다.
근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항상 그 길에 있었다.
아침에도, 밤에도.
내가 새벽에 나가도 그녀는 달리고 있었고, 밤 10시에 나가도 그녀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무슨 시스템이지...?
그녀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걷지도 않았다.
그렇게 여러번 마주치게 되면 눈인사라도 한번 할 법도 하지만,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땅만 바라보고 있던 그녀는 주변 사람과 단절되어 있었다.
쉼표 없는 러닝머신 같았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나도 다시 출근을 시작했고, 그 자전거&산책로를 나가 걷는 일도 줄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이상한 여자 하나 있어. 가방 앞으로 메고 매일 달려. 심지어 오후에도 있더라.”
…설마?
며칠 뒤 주말, 엄마와 함께 산책하던 날 그녀는 여전히 그 길을 달리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마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사람이었다.
또 시간이 흘렀고, 코로나가 시작된 해.
재택이 섞이면서 걷는 시간이 다시 생겼다.
그녀는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좀 더 말라 있었다.
가방도 여전히 앞에 메고 있었고, 모자도 깊게 눌러쓰고,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마치, 이 길 위엔 나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처럼.
그녀를 보면 괜히 내가 괜찮지 않은 사람처럼 느껴져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슬펐다.
그리고, 묘하게 끌렸다.
그녀는 왜 매일 달릴까.
가방 속엔 뭐가 들었을까.
언제쯤 멈추려는 걸까.
아니, 멈추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걸까.
그 길을 더 이상 걷지 않게 된 지도 오래다.
그녀가 아직도 그 길을 달리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왜일까?
근데 오늘 아침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
기억은 점점 흐릿해지는데 그 풍경은 또렷하게 남아 있다.
그 조용한 고독, 그 묵묵한 리듬, 그 누구와도 닿지 않던 침묵 같은 달리기.
그녀는 어쩌면 지금도 그 길 어딘가에서 모자를 눌러쓴 채, 가방을 앞으로 맨 채, 그냥, 아무 말 없이 달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오늘따라 오래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