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퇴사하며 침묵을 부탁한 이유

by 프로불평러

울먹이는 후배의 인사

“차장님… 저 진짜 연락 안 드리려고 노력했어요. 죽을 힘 다해서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는 눈가를 붉히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가슴 안쪽에선 조용한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졌다.


당분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

퇴사를 결정했을 때, 나는 팀원들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당분간은… 연락을 하지 말아줬으면 해.”
그게 좋은 이야기든 나쁜 이야기든, 회사에 관한 어떤 소식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정이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회사를 나서더라도 마음은 여전히 그 안에서 맴도는 경우가 있다.

동료들의 메시지, 조직 안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 그 모든 소식은 나를 다시 ‘그 안’으로 데려다 놓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탁한 거였다.

당분간은, 회사 바깥의 나로만 살게 해달라고.
그 말은,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고 나를 믿고 따르던 후배들과의 마지막 신뢰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인수인계

나는 인수인계 문서를 유난히 꼼꼼히 만들었다.
하나하나 문서화했고, 동선과 맥락과 예외 상황까지 정리했다.
혹시라도 내 자리에 누군가 앉게 된다면, 이 문서 하나만으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게 그들을 두고 떠나는 내가, 당분간은 연락을 하지 말라고 부탁했던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떠났다.
그 후 몇 개월간, 회사 사람들과 어떤 연락도 하지 않았다.
아무도 먼저 연락해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내 안부를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비워낸 시간은 회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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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이 내겐 생각보다 큰 회복이 되었다.
회사 밖의 나로 천천히 익숙해질 수 있었고, 비로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회의’ 생각이 먼저 나지 않았다.
지하철 노선이 아닌 햇살의 각도를 따라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몇개월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먼저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잘 지내?”
“우와~ 이제야 연락이 오네. 차장님, 너무 오래 걸린거 아니예요? 만나요 만나!!”

그렇게 우리는 다시 만났고, 그 자리에서 한 후배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말했다.
“저 정말… 죽을 힘 다해 연락 안 드렸어요. 그거 하나는 꼭 알아주셔야 해요.”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나는 그제야 들었다.
합병과 개편, 정리해고와 처우 변화.
멀리서 다니던 친구는 매일 2시간 넘게 통근하다 결국 떠났고, 회사 근처로 이사했던 이는 그리 멀지 않아 해고를 통보받았다고 했다.

모두들 아프고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아준 사람들이 있었다.


그 침묵은 잊힘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그 침묵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아직도 그 안에 머물고 있었을지 모른다.
잊혀지는 게 두려웠던 내가, 결국 누군가의 조용한 사랑 덕분에, 잊혀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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