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이던 그곳, 빛나던 그들

by 프로불평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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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좋은 개살구

1년 남짓 근무했던 회사가 있었다.
IT 헬스케어 서비스를 하는 회사라 했고, ‘헬스케어’ 콘텐츠를 경험해보지 않았던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막상 가보니 떠오른 말은 ‘빛 좋은 개살구’.


대화 없는 사무실

개발자들은 기획팀에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사무실은 같은 공간을 쓰면서도 대화가 없었다.
점심시간에도 각자 자리에서 혼자 밥을 먹고, 게임을 하거나 책상에 엎드려 잤다.
운영팀은 기획팀을 건너뛰고 개발자에게 직접 요청을 넣었고, 기능은 꼬여 오류가 나곤 했다.


숨어 있던 어벤저스

그런데, 그 안에는 분명한 보물이 있었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성실하게 자기 몫을 다하는 숨겨진 인재들.
기획, 디자인, 개발, 운영팀에 한두 명씩 있었다.

회의실에선 우리의 안을 함께 검토하며 장단점을 짚어주던 개발자. 자기 일이 아닌 것도 뒤에서 몰래 찾아와 조언해주던 사람.
수정사항을 쓰는 순간 동시에 반영해버리던 디자이너.
불편함을 감수하며 고객과 협의까지 맡아주던 운영팀.
그리고 문제의 뿌리를 꿰뚫던 기획자 후배.

나는 그들이 너무 마음에 들어 자주 플러팅을 날렸고, 그들은 눈을 흘기며 웃었다. 그렇게 조금씩 사무실이 환해졌다.


작은 웃음, 큰 변화

걷기 챌린지 서비스를 리뉴얼할 때는 QA 데이터가 많이 필요했는데, 소수 인원만으로는 부족했다. 운영팀과 얘기해 테스트 중인 서비스에서 목표를 달성하면 ‘새우깡 1봉지’를 경품으로 주기로 했더니, 그 작은 경품 하나에 모두가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데이터가 모였고 기능 오류들이 확인되어 수정됐다. 개발자들도 직접 참여하며 오류를 발견해 더 적극적으로 고쳤다.


팀 간식비가 여유 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떡볶이 간식 파티’도 종종 열었다. 특히 분위기를 흐리던 팀장님이 없는 날을 공략해서. 몰래 할 수는 없었으니 주간 회의에서 팀장님 부재 일정이 공지되면, 웃으면서 “그날 간식비로 떡볶이 먹어야겠네요.” 했다가 “야~! 너는 왜 나 없을 때만 간식 먹냐?”라는 핀잔 아닌 핀잔을 듣기도 했다.


통유리 창 너머 운영팀이 이사님이 쏜 치킨을 먹는 걸 보길래, 이사님과 딜을 해서 우리 사무실에도 치킨을 얻어내기도 했다. 디자인·개발 선임들과 가위바위보로 아이스크림 내기를 해서 일하는 중간에 돌리기도 했다.

엉망인 프로세스는 여전했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활기를 되찾았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웃는 법을 배워갔다.


그렇게 유쾌하게 일하며 그들은 엉망이었던 서비스를 하나씩 하나씩 안정화시켜냈다.


떠난 자리, 남은 얼굴

그리고 1년 뒤, 나는 회사를 떠났다.

더 나은 조건이 있었고, 더 나은 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그들이 그리워 정기적으로 만났다.
퇴사 후에도 내 이야기가 회자된다고, 그들은 웃으며 전해주었다.

지금은 각자의 길로 흩어져 연락이 끊겼지만, 그 시절 함께 웃고 버텼던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내 기억에 선명하다.

사람이란 결국 이렇게 남는다.
힘들었던 기억보다, 함께 웃었던 순간으로.
조직은 무너져도, 마음을 나눈 사람들의 흔적은 오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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