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름한 얼굴에 큰 키, 가녀린 몸매, 목소리는 꾀꼬리 사촌쯤 되었던가? 암튼 엄마는 노래도 잘 불렀다. 국수를 맛있게 삶아서 동내 큰일에 불려 다니며 솜씨 자랑을 했던 엄마.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멋진 여성의 모델이 됐을 텐데.
직장생활을 했던 내가 일주일 만에 집 마당에 들어서니 집안이 고요했다. 이집 저집 기웃거려도 엄마는 없었다. 심심하기도 해서 벽장 문을 열고 양말 바구니를 꺼냈다. 여러 개가 구멍이 나 있고 발가락이 헤지고 뒤꿈치가 떨어진 양말이 바구니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다.
늦은 봄이어서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양말을 꿰매기 시작했다. 못 신게 된 양말을 잘라 뒤꿈치에 덧대고 예쁘게 꿰매 놓으면 동생들이 한동안은 잘 신겠지. 엄마가 바느질하실 때 곁눈으로 배운 것이 이렇게 쓸모 있어서 마음이 흐뭇했다.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들여다보시며 요즘 처자 같지 않다고 칭찬해주셨다. 시대가 변해도 아주 많이 변해서 양말을 꿰매서 신는다는 것조차 젊은 사람들에겐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70년대에는 누구네 집이든 할 것 없이 그렇게 살았다. 꿰맨 곳이 떨어지면 뜯어내고 또 꿰매는 살림.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이사한 집은 변두리였지만 다행히 마당이 넓어서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가, 닭과 토끼도 키웠다. 생활에 보탬도 됐을 거고 부족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했다. 아버지 수입만 바라보며 자식들을 키우기가 힘들었던 엄마는 공사장에 다니며 일하셨다. 우리 집 쌀독은 드르륵 드르륵 쌀바가지 긁는 소리로 엄마를 괴롭히는 일이 많았다. 때로는 이웃집에서 쌀을 꾸어 밥을 짓는 엄마를 보고, 우리 집도 쌀 퍼내는 소리가 부드러웠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었다.
엄마는 가끔 살짝 쉰내 나는 보리밥을 버리긴 아깝고 그냥 먹기도 껄쩍지근하다며 누룩을 함께 버무려 따뜻한 부뚜막에 방치했다. 몇 시간 후에 열어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양새가 발효가 되는 거였다. 설탕을 넣어서 동생들과 간식으로 먹었던 술밥이다.
엄마는 먹는 것도 변변치 않은데다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공사장에서 일하셨으니, 그 마음속에 보이지 않는 눈물 자국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그런 상황에 있다면 엄마처럼 묵묵히 살 수 있었을까? 산다는 게 고난의 연속이라지만 엄마는 늘 웃으셨다. 손목이 시큰거릴 때면 이불 꿰매는 실로 자기 나이만큼의 매듭을 만들어 손목에 걸며 “이렇게 하면 낫는다.” 하고 민간요법을 쓰셨는데, 어쩌면 그건 자기 주문 같은 것이 아닐까.
봄이 되면 부모님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주먹밥을 싸들고 육백산으로 올라가 산나물을 해오시곤 했다. 나물을 키만큼 등에 지고 깊은 숨을 몰아쉬며 어둑해진 마당에 ‘쿵’ 하고 내려놓으면 동생들과 함께 얼른 달려가 잔뜩 배가 부른 배낭을 열어 열기가 가득한 나물을 꺼내곤 했던 기억은 왜 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지.
“엄마 이건 무슨 나물이야?”
“쌈 싸먹을 수 있는 참나물이야.”
“와~ 이건 뭐야? 인삼 같이 생겼는데?”
“그건 더덕이네. 아버지가 캐셨나보다.”
취나물, 고사리나물, 곰취나물 등 이름도 알 수 없는 나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배낭 두 개에서 나온 나물이 마당에 산처럼 쌓였다. 이튿날 나물들을 삶아서 햇볕에 잘 말린 다음 가지런히 묶어 일부는 팔기도 하고 겨울 양식으로 고방에 매달아 두었다가 나물이 없는 겨울에 볶으면 시장에서 산 것보다 부드러워서 그 맛이 일품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부모님의 자식 사랑은 다 헤아릴 수 없는 것 같다.
가난했어도 우리 집은 항상 웃음이 넘쳐서 담밖에까지 들린다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우리 어릴 때는 모두가 힘들었던 시대여서 유난히 결핵 환자가 많았는데 결국 엄마에게도 몹쓸 병이 오고야 말았다. 결핵에 좋다는 약은 다 복용했어도 때를 놓쳐 버린 탓에 병은 점점 깊어 갔나보다. 몸져누워 계신 적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몇 년을 고생하시다 57세 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엄마. 벌레들이 춤추는 가슴을 안고 얼마나 힘드셨을지. 아버지를 탓하고 세상을 탓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삶도 건조하고 마음도 힘들지만 우리들의 엄마로 함께 있고 싶었을 몸부림은 누가 알겠는가.
엄마에게 가는 길
쏴 쏴 쏴르르
바람에 얼굴을 비비며
엄마에게로 간다
나비처럼 앉아
흐느끼던 엄마 얼굴
만질 수 없는 엄마 얼굴
엄마 얼굴 만지려
온 하늘을 휘젓는다
사랑하는 엄마. 불쌍한 우리 엄마.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울지 않으시던 엄마가 내가 결혼할 때 그 설움의 둑이 무너지고 말았다.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 사람의 몸속에 눈물이 그렇게 많이 들어있는지 몰랐다. 퍼내고 퍼내어도 마르지 않은 샘물 같은 사랑 주시더니, 결혼하면 귀 막고 입 막고 살라 다짐받으시더니, 몸이 아파서 딸 결혼식에도 참석하시지 못한 엄마. 그렇게 서울 가는 열차를 바라보면서 우시던 엄마가 결혼하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다.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불쌍한 우리 엄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