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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로니에 Jul 22. 2021

아비뇽의 추억

프랑스 아비뇽 국제 연극 페스티벌

2021년 6월 파리 지하철에는 무스탕과 겨울 파카를 입은 젊은이들이 보였다.

누구는 6월이라 반팔을.. 누구는 추운 날씨 탓에 겨울 옷을..

그래도 이곳은 파리이기에 누구도 눈치 보지 않는다.

입고 싶은 대로 입을 뿐

하고 싶은 대로 할 뿐


7월이 되었는데도 가디건을 입어야 할 정도로 쌀쌀했던 파리의 날씨

따뜻한 햇살이 그리운 7월 현재 74회 아비뇽 페스티벌 OFF가 한 달간 열리고 있다.

내가 처음 갔을 때는 국제 연극 축제로 더 유명했는데 지금은 무용 공연도 많다고 한다.

페이스북의 아비뇽 페스티벌 페이지를 팔로우했더니 수시로 생중계 공연이 뜬다.

https://festival-avignon.com/fr/edition-2021/programmation/par-date

https://www.facebook.com/festivaloffavignon/


공연 포스터들


아비뇽은 내가 남편을 만난 장소이다.


2005년 3월 즈음, 베프 친구가 회사 때려치우고 배낭여행을 가자고 제안했다.

싫다고 했다. 잘 다니는 회사를 왜 그만두냐고. 유럽에 관심 없다고.

친구는 자기는 나랑 꼭 가야겠다면서 나는 몸만 따라오고 자기가 비행기 예약부터 숙소, 기차 예약까지 모든 것을 다 하겠노라고 했다. 생각해보니 나도 이번이 아니면 살면서 유럽 여행을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신촌에서 친구를 만나 일정을 짰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영국으로 입국 - 프랑스에서 출국하는 일정이었다.

친구는 비행기표도 예약을 마쳤다.


당시 나는 낮에는 회사 일을 하고 저녁과 주말엔 학교 과제를 하러 미술관 박물관 공연장으로 돌아다녔다.


공연기획 수업 중 세계 3대 축제라는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영국 에딘버러 축제는 일정이 안 맞아 갈 수 없고 프랑스 아비뇽 축제는 노력하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친구에게 일정을 조정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친구는 기꺼이 일정을 변경했는데 나 때문에 5주의 여행 중 3주를 프랑스에서 머물게 되었다.



영국에선 내내 우울하게 비가 내렸다. 처음엔 비를 피했지만 나중에는 비를 맞으면 피자를 먹었다.

런던과 캠브릿지에 나와 함께한 발 넓은 베프의 친구들이 거주했기에 우리는 여행도 편하게 했다.

그들이 다 가이드를 해주었고 그들 집에서 숙박과 식사를 해결했다.


문제는 정말 우리 둘이 프랑스로 입국했을 때였다.

영국에서 해저터널을 타고 프랑스 들어온 순간 영국과는 완전 다른 날씨가 우릴 맞이했다. 햇살이 너무 따뜻하고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음악을 들으며 넋을 놓아버렸다.


드디어 파리 기차역에 도착했다. 파리에서 아비뇽 숙소로 내려가기 전 숙소 아저씨가 컨펌을 위해 전화를 달라고 했는데 공중전화 카드를 사서 여러 번 통화 시도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했다.

남부로 내려가는 기차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야 했는데 티켓을 끓으려는 우리 사이로 어떤 남자가 도와주겠다면 티켓을 주었다.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지하철 입구를 가르쳐 주듯 우릴 어디론가 안내했는데 거긴 아무도 사람이 없었다. 티켓 2개 값으로 50유로를 달라고 했다. (5유로도 안 하는 것을..) 친구는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순간 겁이 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밖에 없었다. 사기인 줄 알면서도 그냥 돈을 주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지하철을 타 기차역으로 이동, 아비뇽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남부 정보를 찾기 위해 여행 책을 펼쳤는데 거기에는 요즘 신종 사기라며 지하철에서 표를 대신 끓어주는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쓰여있었다. "젠장" 프랑스 햇살에 넋 놓고 있다가 한방 먹었다.

키 작은 여자 둘이 헤매고 있으니 공격의 대상으로 좋았겠지 싶었다.


결국 아비뇽 숙소의 아저씨에게는 전화를 못 하고 아비뇽 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기차역에 내려 전화를 걸며 "왜 안 되냐"라고 짜증을 내고 있는데 군 헌병대가 "기차역 문 닫아야 한다"며 우리 보고 역 밖으로 나가라고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전화를 부탁했고 밤 12시에 아비뇽 역 앞에서 숙소 아저씨의 차를 기다렸다.

한 20분은 기다렸나 보다. 알고 보니 아비뇽 역이 2곳이었다. 아비뇽 시내 앞에 있는 역이 있고 TGV 기차역은 외곽에 있었다. 그래서 아저씨가 전화를 꼭 하라고 했다고 한다. 역이 2개라서.. 그리고 그날 십여 명의 연극팀이 방을 예약해 놓고 말도 없이 펑크를 냈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안 오나보다 하고 포기한 상태였다고 했다.


결국 밤 12시 반 경에 숙소에 도착했고 라면을 끓여먹었다. 한국에서 가져온 귀한 라면을 숙소 아저씨와 함께 나뉘어 먹었는데 감사하게 김치까지 주셨다.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웬 고삐리 빡빡머리 어린 스님이 거실에서 대자로 누워 자고 있었다.

브런치를 먹을 때 함께 식탁에 앉았는데 군인이라고 했다. 고등학생처럼 생겼는데 나보다 4살이나 더 많았다.

첫인상이 어땠냐고 나한테 물어보면... 그냥 관심 없었다. 군인이건 스님이건.

외국에 남자를 찾으러 온건 내 친구였지 의심 많은 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는 군인이 하는 말이 꼭 내가 하는 말과 같다며 우리를 도플갱어라고 했다.


난 영화를 안 봐서 도플갱어가 뭔지도 몰랐다.

어쨋든 프랑스에 있는 군인과 한국에 사는 나는 전혀 관련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굳이 민박집 아저씨는 불어를 못하는 우리를 위해 아비뇽과 아흘을 관광시켜주라고 군인 오빠를 우리와 함께 집 밖으로 내보냈다.


외인부대에 입대한지는 3년 되었고 휴가기간이라고 했다. 스카이 다이빙하러 아비뇽에 왔는데 아는 분이 아비뇽에서 2달 동안만 민박을 해서 겸사겸사 이곳에 들렸다고 했다. 그렇게 아비뇽에 있는 4일? 동안 늘 우리의 통역원이 되어 주었다.

뜨거운 햇살이 좋았고 나무 아래는 시원했다. 전 세계에서 온 '끼 넘치는 예술가들' 덕분에 시내는 에너지가 넘쳤고 기차역 앞과 길거리에 넘쳐나는 포스터를 보면 생기가 돌았다. 불어도 모르는데 어떤 공연을 봐야 하나 난감했는데 다행히 우리가 본 공연은 말이 없는 플라맹고 공연이었다. 길거리에서 공연도 많이 했다. 여행 중에 중대 연극 동아리?에서 온 팀이 거리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펼쳤는데 그때가 밤 10시경? 아비뇽에 한국사람들이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았다.

"낮에는 이 사람들 다 어디 있었던 거야?"


https://www.youtube.com/watch?v=Er-Gqrtl6nQ


아비뇽 마지막 날에는 숙소에서 오빠와 친구는 여유롭게 수영도 즐겼다. 둘은 참 대화가 잘 통했다. 인류학과인 친구와 역사책을 달달 외운 것 같은 문어체 말투를 가진 군인 오빠는 한번 주제를 선정하면 오랫동안 토론을 이어갔다. 나는 사진 찍기 바빴다.

 

오빠 덕분에 편하게 지내고 파리로 이동해서 스위스로 넘어가야 하는 날, 친구와 내가 어리바리해서 불안하다며 굳이 파리까지 같이 이동했다. 군인 오빠와는 파리에서 헤어졌다. 우리는 스위스행 기차를 타는 기차역으로 이동하려고 지하철을 탔다. 몇 정거장 안 가서 서더니 안내방송이 나왔고 모두 다 지하철에서 내렸다. 우리는 어리둥절해하며 젊은 여자를 붙잡고 물어봤다. 지하철이 고장 났으니 다 내리라는 거다. 우리는 기차역에 가야 하는데 어떡해야 하냐 했더니 택시를 타라고 택시 정류장까지 안내해주고는 우리에게 윙크를 날리며 홀연히 사라졌다. 착하기도 하여라~  


택시를 탔다. 기차역에 도착해 요금을 지불했다. 아저씨는 짐을 옮겨줬으니 팁을 더 내놓으라며 우릴 붙잡았다. 몇 유로를 던져주고 미친 듯이 뛰었다. 우리는 떠나려는 스위스행 기차를 겨우 잡고 마지막 손님으로 올라탔다.


친구 덕에 계속 군인과 연락을 하게 되었고 당시 싸이월드가 우리의 인연을 유지시켜줬다.

다시 파리로 2주 일정을 올 때에 맞춰 군인은 휴가를 냈고 파리와 베르사이유를 가이드해주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파리 샤를 드골 공항 공중전화로 나에게 고백했고 2년 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연애할 때는 전화카드를 사서 국제 전화를 걸던 시절이다.

처음에 별생각없이 우리집 전화로 프랑스에 전화를 걸었다가 한시간 반 정도 통화료로 80만원이 나와서 놀랬던 적이 있다. 그 뒤로 네이트온으로 화상채팅을 했었다.

아~ 옛날 사람~


2007년부터 신혼 3년 동안은 매년 아비뇽 페스티벌에 아비뇽에 방문했다. 겨울에 아비뇽을 간 적이 있었는데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남부는 역시 여름에 가야 제맛이다.

아비뇽에 공부하러 오셨던 공무원 부부께서 한국으로 귀국하시면서 주신 가구들도 유용하게 잘 셨다.

어딜 가나 좋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언젠가는 꼭 애들이랑 다 같이 페스티벌을 보러 갈 거다.


참 아비뇽에도 외인부대가 있다. 그래서 아비뇽, 님므, 몽펠리에, 마르세이유, 오바뉴 등 남부 기차역에서 외인부대원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아비뇽 다리를 배경으로 2007년과 2008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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