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둥근 것을 보면 아파요
둥근 적이 없었던 청춘이 문득 돌아오다 길 잃은 것처럼
그러나 아휴 둥글기도 해라
저 푸른 지구만 한 땅의 열매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수박> 중-
친구들과 하는 시 세미나 덕분에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라는 시집을 읽게 되었다. 2부는 과일에 관한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수박>이라는 시가 눈에 띄었다. 그러므로 오늘은 수박에 관해 적어보고자 한다.
나는 과일 알레르기가 있어 상당수의 과일을 잘 먹지 못하는데 알러지 걱정 없이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과일들 중 하나가 수박이다.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해 온 과일 역시 수박이었다. 그래서 여름에 냉장고를 열어보면 늘 수박이 있었다. 통째로 들어 있든, 아니면 작게 잘라져 통에 담겨 있든.
내 여름은 수박을 제외하면 설명할 수가 없다. 수박씨를 콩인 줄 알고(...) 우적우적 씹어 먹었다던 어린 나부터 씨를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퉤 하고 뱉어 나에게 잔소리를 듣던 아빠, 나를 위해 제사상에 수박을 꼭 올려주던 엄마, 길고 넓적한 우리 집의 수박 전용 용기, 처음으로 혼자 수박을 잘랐던 날, 손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과즙, 음식물 쓰레기 부피를 줄이기 위해 베란다에 수박 껍질을 바싹 말리던 기억까지. 작고 사소한 기억들이 붉은 과일에 가득 담겨 있다. 수박 없는 여름은 내겐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애초에 수박 없이 여름을 나는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나? 수박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지금 내 인생 사상 최초로 수박 없는 여름을 나고 있다. 캐나다에 온 이후로 수박을 먹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작년엔 그래도 한국에서 수박을 많이 먹고 왔는데 올해는 수박을 먹은 기억이 전혀 없다. 잠시 동안 잊고 살았는데 의식하고 나니 수박이 너무나도 먹고 싶다. 집 근처 마트에서 작은 용기에 담긴 수박을 팔기는 한다만 무거운 것들이 잔뜩 든 장바구니에 담아 오기에는 아슬아슬해서 늘 포기했다. 수박을 한 번도 먹지 않고는 여름을 보낼 수 없으니 다음번에는 결국 사 가지고 올지도 모르겠다.
이곳 몬트리올에서 만나 겨울 즈음 한국으로 떠나보낸 친구에게서 선물 받은 향초가 있다. 수박과 레모네이드 향이 섞여 있는, 불을 붙이면 온 방에 달큰한 향을 가득 퍼지게 하는 향초다. 잠에 들기 전 잠깐씩 켜놓고 향을 맡거나 타오르는 불빛을 구경하곤 했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라이터가 닿지 않을 정도로 닳아 버려 더 이상 사용할 수는 없지만 아직도 향초에 코를 박으면 향이 맡아진다. 수박이 없어 허전한 마음을 이걸로라도 달래 보아야겠다.